이수완 논설실 부국장
alexlee@ajunews.com
- 아주경제 논설위원
- 前 로이터 통신 선임 특파원, 편집장
- 前 서울외신기자클럽회장
- [이수완의 월드비전] 한배 탄 필리핀의 두 정치 명문가…. 헤어질 결심? 두 가문의 전략적 동맹 지난달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TIME)은 페르디난드 '봉봉'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66)을 ‘2024년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 그는 부패와 독재, 야당 탄압에 항거한 1986년 '피플 파워' 혁명으로 축출될 때까지 20년 넘게 장기 집권했던 악명 높은 지도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외아들로 2022년 대선에서 필리핀 17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무려 60% 득표에 가까운 압도적인 승리였다. 전임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의 맏딸 사라 두테르테(45)는 한때 유력한 대권 후보로 떠올랐지만 결국 마르코스 주니어의 러닝 메이트로 출마해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북부 루손 지역의 대표적 정치 세력인 마르코스 가문과 남부 민다나오의 비사야를 대표하는 두테르테 가문의 전략적 동맹으로 차기 권력 분점까지 노린 포석이었다. 두테르테 가문의 지원에 힘입어 대권을 거머쥔 마르코스 주니어는 중국에 몸을 낮추었던 두테르테 전 대통령의 외교노선을 어느 정도 이어갈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선거 기간 그는 두테르테가 중국과 긴밀한 관계를 모색한 것을 두고 선경지명이 있었다고 평가를 하기도 했다. 당선 직후 언론 인터뷰에서도 "미국을 끌어들이면 중국을 적으로 만든다"며 외교정책 전환에 조심스러운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해 5월 바이든 대통령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한 이후 양국 간 동맹 강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달에는 백악관에서 바이든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사상 처음 3국 정상회의를 개최했다. 3국은 중국과 영유권 분쟁으로 긴장이 높아지고 있는 남중국해에서 해상안보 위협에 공동 대응하고 필리핀 북부 지역의 인프라 개선과 공급망 구축 등 경제협력을 강화해 나가기로 합의했다. 미국 주요 언론은 3국의 안보협력 선언을 두고 미국이 중국을 상대로 구축 중인 '격자형(lattice-like)' 견제망이 완성됐다고 분석했다.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은 재임 기간 미국을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던 두테르테와 달리 중국 대신 미국을 최우선 순방지로 택해 필리핀의 외교적 전통을 부활시켰다. 그는 대만 코앞에 있는 필리핀 군사기지 4곳에 대한 접근과 사용권을 미국에 추가로 허가하고, 양국 간 합동훈련도 실시했다. 일본과는 자위대 훈련 동참과 파견 협정까지 추진하고 있다. 또 두테르테 재임 기간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합의한 것으로 추정되는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 관련 '밀약'을 문제 삼아 진상 규명을 공언하고 있다. 반면 두테르테 전 대통령은 퇴임 후에도 지난해 7월 시 주석과 만나 자신은 양국 간 우호협력을 추동하는 역할을 지속적으로 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하기도 했다. 미국에 필리핀은 지정학적으로 중국 견제를 위한 필수적 요충지다. 과거 바이든 대통령은 상원의원 시절 마르코스 독재정권의 부패와 인권 탄압을 비판하는 데 앞장선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치는 현실이다. 남중국해에서 '9단선'이라는 가상의 바다 경계를 쳐 놓고 주변 국가를 위협하는 중국을 견제하고 이곳의 자유통행권을 보장하기 위한 다자간 안보협력체제를 강화하려는 바이든 행정부에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은 '천군만마'와 같은 존재일 것이다. 타임지는 마르코스 주니어를 '2024년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중 한 명으로 선정하면서 그가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침략에 확고히 맞서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으며 지역과 전 세계 긴장 고조에 대응해 미국과 동맹을 강화해왔다”고 소개했다. 필리핀 대선은 전통적으로 지역 엘리트 간 연합이라는 지역 구도가 중요한 요소다. 두테르테 전 대통령의 아버지는 1965년 마르코스 내각에서 행정비서관을 지낸 정치적 동지로 두 가문은 오래전부터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태생적으로 '우파' 성향인 마르코스 가문과 '좌파' 성향의 두테르테 가문은 물과 기름의 조합이다. 전략적 동맹으로 지난 대선에서 압도적 지지를 얻는 데 성공했지만 최근엔 외교 노선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민감한 개헌 문제에서까지 충돌하면서 필리핀 정국이 술렁이고 있다. 특히 내년 상·하원 선거와 지자체장을 뽑는 중간 선거를 앞두고 있는 가운데 양측은 각자 지지 기반 구축에 나서면서 균열이 더욱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두테르테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대통령의 6년 단임 제한을 4년 중임의 내각제로 헌법 개정을 추진하려 했지만 실패한 경험이 있다. 지금은 마르코스 주니어 정부가 외국인 투자를 늘린다는 명분 아래 개헌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국내 산업에 대한 외국인 지분을 40%로 제한하는 현행 헌법은 글로벌 시대에 필리핀의 경제성장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다. 두테르테 전 대통령은 마르코스가 그의 선친처럼 헌법 개정을 통해 장기 집권을 노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개헌은 1억1000만 인구의 필리핀에 매우 민감한 문제다. 필리핀은 원래 4년 중임의 대통령제 였으나 마르코스 전 대통령은 계엄령과 헙법 개정을 통해 1986년까지 21년간 장기 집권했다. 대통령 임기를 6년 단임으로 제한하는 현행 헙법은 1987년 제정되었다. 2028년 대선에서 자기 집안에서 대통령을 배출하고 싶은 두테르테 전 대통령에게 마르코스의 개헌 추진은 자신의 야망에 최대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 만다나노 분리독립 두테르테 전 대통령은 지난 1월 자신의 정치적 본거지인 민다나오 최대 도시 다바오시에서 열린 개헌 반대 집회에서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을 마약 중독자라고 비난했다. 그는 또 마르코스 주니어 정부가 집권 연장을 위한 개헌을 추진한다면 민다나오 지역을 분리 독립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이에 필리핀 정부는 2월 4일 에두아르도 아노 국가안보보좌관 명의로 성명을 내고 어떤 분리 시도라도 단호한 힘으로 맞설 것이라고 천명했다. 남한 면적과 비슷한 민다나오는 필리핀에서 둘째로 큰 섬으로 '모로'라고 불리는 필리핀 무슬림 토착민들이 가톨릭 문화권인 필리핀 정부에서 자치·독립하겠다고 요구하면서 정부군과 무력충돌이 빈번한 지역이다. 오랜 내전으로 빈곤율과 밤죄율이 가장 높은 이 지역에서 두테르테는 검사로 활동하며 초강력 범죄와의 전쟁으로 명성을 높이다가 1988년 다바오 시장에 당선됐다. 지난 1월 집회에서 현 다바오 시장인 두테르테 대통령의 차남 세바스찬 '바스테' 두테르테는 마르코스 대통령에 대해 "일에 집중한다기보다는 정치와 자기 보호를 최우선으로 하고 있다"며 "국가에 대한 애정과 열망이 없다면 사임하라"고 촉구했다.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은 자신에 대한 두테르테 가문의 맹공격에 대해 무대응에 가까운 수세적 반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자신을 마약 중독자라고 비판한 두테르테 전 대통령에 대해 해당 발언이 두테르테 대통령이 수년 전 마신 "페나닐 부작용 때문"이라며 "의사들이 그를 잘 돌봐주길 바란다"고 맞받아친 것 외에는 전직 대통령과 정면 대결하는 것은 피하고 있다. 국내외 언론들은 마르코스의 이러한 미온적 대응에 대해 그가 성격이 너무 유해서 그렇다고 분석하다가도 아마도 지난 대선 때 두테르테 가문에 진 '빚' 때문일 것이라는 추측을 내놓기도 한다. 두테르테 전 대통령은 지난 2월 25일 세부시에서 열린 집회에서 자신이 개헌을 무조건 반대하는 입장은 아니라고 해명했다. 그는 새 헌법이 현 대통령의 재출마를 금지한다면 개헌에 찬성할 것이라는 입장을 내놓기도 했다. 루손 회랑 마르코스 대통령은 미국·일본과 3국 협의를 통해 안보와 경제 지원을 얻어냈다. 사실 3국 정상회담 결과를 두고 바이든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가 안보적 측면에서 협력 강화를 강조하고 있는 반면 마르코스는 국내에서 이번 회담의 경제적인 성과를 홍보하고 있다. 필리핀에 대한 수십억 달러의 투자 유치를 기대하게 만드는 이른바 '루손 회랑'은 필리핀 주요 지역을 연결해 철도와 항만 현대화, 에너지·반도체 공급망 구축을 통해 중국이 동남아에서 공들여온 '일대일로' 구상에 맞불을 놓는 성격이다. 마르코스가 현재 중국을 지나치게 자극하지 않기 위해 안보 협력 대신 경제 협력을 강조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지만, 실제로 마르코스 정부는 태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과 비행기로 3시간 이내로 연결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필리핀을 아세안의 제조업과 물류 허브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특히 미국 반도체 기업들이 공급망을 전쟁 위협이 있는 대만이나 중국에서 다른 지역으로 다변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가운데 필리핀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필리핀은 배터리 제조에 필수인 니켈을 2023년 기준 전 세계에서 둘째로 많은 매장량을 가지고 있다. 마르코스의 친미 행보 배경엔 경제가 자리 잡고 있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갖는다. 향후 두 가문의 대립과 갈등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지만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은 두테르테 전 대통령 딸이자 현 정부의 부통령 겸 교육부 장관인 사라 두테르테 부통령과 한 배를 타고 있는 처지다. 더욱이 사라 두테르테는 현재 차기 대권 주자로 언급되는 인물 중에서 가장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마르코스 대통령으로서는 필리핀 정가의 '떠오르는 별' 사라 두테르테를 적당히 견제할 필요는 있겠지만 그녀와 관계 복원이 불가능한 엄청난 균열이 생기는 것도 두려워할 것이다. 최악에는 마르코스 주니어가 36년 전 축출된 아버지의 비극적 운명을 이어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두테르테 전 대통령은 22년간 다바오 시장직을 7차례 연임하면서 사병부대인 다바오 척살대(Davao Death Squad)를 동원해 무법 천지였던 도시를 범죄 없는 상업도시로 탈바꿈시켜 놓았다. 2016년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에도 마약사범 수천 명이 경찰에 사살되고 무고한 시민들까지 불법 체포되어 희생되자 국제 인권단체들이 심각한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두테르테는 대통령에 당선된 후 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방부 처리되어 필리핀 북부 고향에 안치돼 있던 마르코스 전 대통령 시신을 국립묘지에 안장시켜 주기도 했다. 사실상 독재자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복권을 승인한 것이며 독재자 가문 간 정치적 동맹이 이때부터 본격 시동을 걸었다고 볼 수 있다. 마르코스 주니어는 지난 선거에서 페이스북과 유튜브 등 소셜미디어를 적극 활용해 젊은 유권자를 집중 공략함으로써 선친의 집권 시절 어두웠던 필리핀 역사를 교묘하게 지우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두테르테 가문의 주장처럼 마르코스 주니어가 차기 대권이 두테르테 가문에 넘어가는 것을 막고 자신의 집권 연장을 위한 개헌을 추진하고 있다면 양측 간 정면 충돌은 불가피해지고 필리핀 정세는 급격히 불안해질 수 있다. 특히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를 놓고 중국과 충돌이 격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두 가문 간 충돌은 필리핀 경제와 안보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마크코스 주니어 대통령이 국내외 수많은 난제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세계는 주시하고 있다. 특히 미·중 간 전략적 경쟁 사이에서 장기적으로 국익에 부합하는 외교와 안보 전략을 수립해야 하는 우리나라는 그의 행보에 관심이 더 클 수밖에 없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 2024-05-08 15:24:25
- [이수완의 월드비전] 모디의 3연임 확신 ..'근거있는 자신감' 자유 민주주의의 거대한 실험장 오는 19일 한 달 반 일정으로 인도 총선이 막을 올린다. 최근 중국을 제치고 인구 1위 국가로 올라선 인도는 세계 최대 민주주의 국가로도 불린다. 1947년 200년 가까운 기나긴 영국의 통치에서 벗어나 의원내각제를 채택한 후 헌정 중단 사태 한 번 없이 선거를 통해 평화적 정권 교체가 이뤄지고 있다. 그리하여 인구 14억명의 인도는 자유 민주주의의 거대한 실험장으로 불린다. 10년 전 나렌드라 모디 정권이 출범한 이후 힌두 근본주의가 민주주의를 위협할 것이라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인도는 그의 강력한 리더십과 눈부신 경제 발전을 바탕으로 글로벌 경제의 축으로 부상하고 있다. 모디 총리가 3연임에 성공할 경우 그는 현대 인도의 ‘국부(國父)’ 격 인물이자 1대 총리를 지냈던 자와할랄 네루(1889~1964)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기록을 갖게 된다. 인도는 5년마다 치르는 총선에서 록사바(Lok Sabha)라고 일컫는 하원 의석수(534명) 과반을 확보한 정당이 총리를 배출한다. 이번에도 직전인 2019년 선거 때처럼 광활한 전 국토를 7개로 나누어 100만여 개 투표소에서 순차적으로 실시된다. 개표 결과는 6월 4일 일제히 발표된다. 유권자 수는 유럽연합(EU) 전체 인구를 합친 것보다 많은 9억6900만명이다. 세계 최대 규모의 선거를 공정하고 안전하게 관리하려면 그만큼 비용도 엄청날 수밖에 없다. 인도 선거법은 유권자가 있는 장소의 2㎞ 이내에서 투표를 하도록 규정하고 있어 선거 관리와 안전 요원은 산골 오지와 도서 지역까지 장거리 이동에 나서야 한다. 2019년 선거 땐 공무원 1500만명이 동원되었고 정당들은 70억 달러(약 9조4700억원) 이상을 지출했다. 올해 선거 비용은 직전 선거보다 두 배 이상에 달할 것이라고 주요 언론은 예상하고 있다. 모디 총리는 자신의 3연임을 확신하고 있다. 심지어 그는 지난달 각료 전체회의를 소집해 총선 이후 100일 국정 운영의 우선 과제까지 논의했다. 그가 승리를 자신하는 근거는 수년째 70%대를 유지하는 콘크리트 지지율과 집권 여당인 인도국민당(BJP)에 몰리는 막대한 정치 후원금이다. 그동안 모디의 고성장·친기업 정책에 수혜를 입은 인도 대기업들은 집권당에 정치 자금을 집중 지원하고 있다. 미·중 관계 악화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세계 공급망 재구성도 인도에 유리한 환경이다. 무려 3800㎞의 국경을 맞댄 이웃 나라인 중국에서 자본 유출을 걱정할 정도로 글로벌 기업들의 투자자금이 급격히 빠져나가는 반면 새로운 수출기지로 떠오르는 인도에는 외국인 투자가 크게 증가하고 있다. 2014년 모디 정부 출범 이후 인도 증시에 상장된 기업의 시가총액은 무려 3배로 늘어났다. G20 국가 중에서 가장 빠른 성장세를 지속하면서 인도의 경제 규모는 모디 정부 출범 당시 세계 11위에서 지난해 영국을 제치고 5위로 올라섰다. 이대로 가면 5~6년 후엔 독일과 일본을 추월해 미국·중국에 이어 세계 3대 경제대국이 될 전망이다. 모디의 3연임을 낙관하는 모건스탠리와 JP모건체이스 등 서방의 주요 투자은행들은 인도에 대한 주식과 채권 비중을 적극 늘리고 있다. 만에 하나 모디 총리가 이번 선거에서 패배한다면 인도 주식이 25% 이상 폭락할 것이라는 경고까지 등장하고 있다. 1950년 인도 서부 구자라트주 바드나가르에서 태어난 모디는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버스터미널에서 전통차와 빵을 팔던 가난한 소년으로 자랐다. 하층 카스트 출신인 모디는 21살 때인 1971년 힌두민족주의 단체인 민족의용단(RSS)에 가입해 빈민층을 위한 사회운동으로 정치에 입문한 이후 최고의 '인생 역전 드라마'를 써나간다. 그는 1980년 RSS를 기반으로 조직된 정당인 BJP에 가입해 2001년 구자라트주에서 총리로 선출된 모디는 강력한 개방정책을 펼치고 도로, 용수, 전력 등 집중적인 인프라 개선에 나서 국내외 기업들이 구자라크주에 몰리게 했다. 그가 취임한 이후 13년간 구자라트주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13%로 인도 평균 성장률의 두 배에 이르렀다. 중앙 정치의 관심을 받던 그는 '모디 돌풍'을 일으키며 2014년 하층 카스트 출신으로는 처음 인도 총리에 올랐다. 10년의 명암 지난 10년간 모디 총리의 국정 수행 기록을 살펴보자. 우선 도로와 철도 공항 등 인프라 개선과 세제 개혁을 통해 서비스 분야에 비해 취약한 제조업 발전 기반 마련에 착수했다. 인도 28개 주에 난립해 있던 10여 개의 간접세를 상품·서비스세(GST)로 통합해 인도 시장의 복잡한 세제를 단일화했고 동시에 세수와 공공지출 확대 기반을 마련했다. 그동안 주민등록 제도가 없어 신분 증명이 어려웠으나 생체인식 정보 기반인 아다르 카드 도입을 통해 디지털 경제와 현금 없는 신용사회로 신속히 탈바꿈시켰다. 게다가 낙후된 농촌 지역에는 휴대폰이 널리 보급되어 주민들 삶이 크게 바뀌고 빈민층을 대상으로 무료 식량 배급과 주택, 건강보험 제공 등 사회복지사업도 크게 늘렸다. 하층 카스트 출신으로 그의 서민적 이미지에 저소득층에 대한 복지 정책이 확대되며 그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모디 정부가 자랑하는 눈부신 고성장 업적 속에는 어두은 그림자도 숨어 있다. 2016년 그가 부정부패 척결을 명분으로 실시한 무리한 화폐개혁과 2020~2021년 코로나 팬데믹 기간 실시한 강력한 록다운(봉쇄) 조치로 인도 경제는 대혼란을 겪기도 했다. 인도가 고성장의 길을 걸으며 소비력을 갖춘 중산층이 늘어나고 해외 기업들이 그들을 공략하기 위해 인도 시장에 몰려오는 가운데 전통적인 부의 세습과 양극화 문제는 사회 안정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현재 인도 전체 인구 중 90%는 연 소득이 3500달러 이하 수준이다. 인도 경제 발전의 메인 동력은 정부에 의해 엄격하게 통제되는 대기업 집단과 소수의 부유층이다.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는 모디가 자랑하는 인도의 경제적 성과로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혜택은 미미하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디에게는 국가 리더에게 필요한 특별한 무엇이 있는 듯하다. 힌두 민족주의자 특유의 카리스마적 리더십과 화려한 쇼맨십을 무기로 국가의 미래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를 국민들에게 계속 제시하며 인도의 복잡한 정치적·사회적 갈등을 풀어나간다. BJP는 2014년 총선에서 '모디 돌풍'에 힘입어 놀랍게도 절반이 넘는 282석을 차지하며 집권했다. 5년 후인 2019년에는 303석을 차지하며 30여 년 만에 인도 단일 정당으로서 최다 의석을 차지했다. 2019년 선거에서 예상을 뒤엎고 압승을 거둔 것은 국가 안보에 대한 모디 정부의 단호한 대응 때문이었다. 선거 직전 파키스탄과 영유권 분쟁을 빚고 있는 카슈미르 지역에서 인도 경찰관 40명이 이슬람 무장단체 공격으로 숨지자 파키스탄을 배후로 지목하고 보복 공습을 단행했다. 지난 반세기 동안 3차례 전쟁을 치렀고, 핵전쟁 직전까지도 갔던 파키스탄에 대한 응징은 모디를 결단력 있는 인물로 부각시키고, 선거의 주요 이슈를 경제 둔화에서 안보로 전환시켰다. 갑부들의 정치적 후원금이 대거 몰리는 BJP는 인도에서 가장 부유한 정당으로 자리매김했다. 또 충성도가 매우 높은 당원들의 수도 크게 늘어나고 있다. 게다가 정부의 보복을 두려워하는 국내 언론은 대부분 모디 정부에 길들여져 고분고분해졌다. 인도 전역에 걸쳐 신문이나 TV 광고는 모디 총리 얼굴과 이미지로 도배되어 있다. 여당은 지난해 뉴델리에서 G20 정상회의를 주재한 모디 총리를 '세계의 스승(Vishwaguru)'으로 선전하고 있다.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BJP를 주축으로 한 중도우파연합 '국민민주동맹(NDA)'은 이번 총선에서 전체 534석 중 약 70%에 달하는 최소 378석을 확보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BJP의 현재 의석수(303석)를 훨씬 웃돈다. 앞서 BJP는 자체 의석수로 370석, NDA의 의석수 400석을 목표로 세운 바 있다. 제1야당인 인도국민회의당(INC)는 '간디-네루' 가문이 지배해온 정당으로 2014년 모디의 거센 돌풍 앞에서 겨우 44석을 얻는 데 그쳤다. 야권은 지난해 INC와 26개 정당이 뭉친 '인디아'가 결성되었으나 이번에도 힘겨운 싸움이 예상된다. 말리카르준 카르게 (Mallikarjun Kharge) INC 총재(80)는 상원의원과 장관을 지낸 베테랑 정치인이지만 모디 총리의 대중적 지지와 견주지 못한다. 그는 최근 선거 유세에서 "BJP가 다시 집권하면 모디의 독재가 늘어날 것"이라며 "민주주의는 무너질 것이며, 모디는 러시아에서 푸틴이 하는 것처럼 나라를 운영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모디 아니면 누구?"라는 인식이 관망자적 유권자들의 마음에 깊이 자리 잡고 있다고 외신들은 분석하고 있다. . ‘성장의 인도’ ‘강한 인도’ 모디 정부는 지난해 독립 100주년(2047년)이 되는 해에 인도가 선진국에 진입할 수 있도록 긴 여정을 시작하는 원년으로 선포했다. ‘성장의 인도’를 바탕으로 ‘강한 인도’ 건설을 추구해온 모디 정부는 국방 예산을 대폭 증액하며 군사강국으로 도약하고 있다. 외교적으로 사안별로 동맹을 추구하는 신(新)비동맹 정책으로 인도는 미국과 중국, 러시아 모두에게서 구애를 받고 있는 귀하신 몸이다. 또 전 세계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글로벌 사우스'의 맏형 격으로 우뚝 서 있다. 오는 11월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다시 미국 대통령이 될지라도 인도에만큼은 관계를 악화시킬 만한 일을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까지 나오고 있다. 인도가 글로벌 투자자들에게 가장 매력적인 대상으로 꼽히는 이유다. 지난달 11일 모디 총리는 지지층 결집을 위해 반(反) 무슬림법으로 비판받는 '시민권 개정법(CAA)'의 전격 시행에 들어갔다. 2019년 법안 통과 후 인도 인구의 14%를 차지하는 이슬람교도의 거센 반발로 4년 동안 시행이 미뤄졌지만 총선을 코앞에 두고 갑자기 실시된 것이다. 얼마 전엔 수도 뉴델리에서는 총선을 앞두고 부패 혐의로 야당 인사들이 체포되자 대규모 반정부 집회가 개최되기도 했다. 모디 총리가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힌두 민족주의’가 ‘전체주의’로 치달을 수 있다는 우려가 고조되고 있지만 모디 총리의 3연임을 가로막지는 못할 전망이다. 최근 미국 퓨리서치(Pew Research) 센터가 밝힌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80% 넘는 인도 국민들은 모디와 같은 ‘권위주의적’ 지도자를 선호하고 있다. 시대적 배경과 통치 스타일이 다르지만 모디는 네루 총리 이후 인도에서 가장 사랑받는 정치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 2024-04-07 16:14:01
- [이수완의 월드비전] 미국 경제 훈풍이 트럼프 기세 꺽을까 조 바이든 대통령(81)은 오는 11월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의 운명의 리턴매치를 준비하고 있다. 그의 기억력 문제를 제기한 특검보고서를 계기로 고령 리스크가 선거의 주요 이슈로 재부각되자 백악관은 지난 주 실시한 바이든 대통령에 대한 건강검진 결과를 언론에 알리며 대통령 직무수행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의 고령과 치매에 대한 논란이 이어지는 가운데 그의 선거 캠프는 현 행정부의 정책적 성과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외교.안보 정책의 베테랑답게 바이든 대통령은 자유주의 동맹국들과의 연대 복원에 힘쓰고 미 의회와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경제분야 성적표도 높은 물가를 제외하면 내세울 만하다.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은 코로나19 팬데믹을 극복해 냈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와중에서도 경제 지표가 전반적으로 나름 견실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현재 미국 경제의 최대 골칫거리인 인플레이션은 연준의 목표치 2% 아래로 아직 내려가지 못했지만 꾸준히 둔화하고 있다. GDP 성장률은 다른 국가들과 비교해 팬데믹 이후 깜짝 회복세를 나타냈다. 고용시장도 놀라울 정도로 강세이고 주가도 신기록 경신을 거듭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 경제의 고공행진은 바이든에 대한 대중의 지지율 상승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팬데믹 국면을 거치면서 미국인들은 정부가 쥐어준 현금 지원으로 가계는 막대한 저축을 보유하게 되었다. 연준이 2년이 채 안되는 기간 금리를 0~0.25%에서 5.25~5.5%까지 인상하면서 그동안 풀린 엄청난 돈을 회수하고 인플레이션 잡기에 나섰지만 미국인들의 소비 여력은 위축되지 않고 있다. 연준의 통화 긴축으로 건설 투자와 산업생산 위축 등 경기 하강 압력이 커졌지만 미 고용시장의 견고함은 전문가들도 어리둥절하게 만들 정도이다. 지난 1월의 신규고용은 35만3000명으로 시장 예상을 압도했다. 실업률은 올해 1월 3.7%로 집계되고 지난 2년동안 지속적으로 4%를 하회하고 있다. 지난해 미국 경제는 연준의 공격적인 금리인상 조치에 침체 국면에 빠질 것이라는 일반적인 예상이 빗나가며 고도의 성장세를 나타냈다. 상무부는 최근 지난해 4분기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이 전 분기 대비 3.2%로 집계됐다고 발표했다. 작년 3분기 성장률인 4.9%보다 둔화했지만 로이터의 시장 추정치 평균인 2%를 크게 웃돌았다. 올해 1분기는 4.2%까지 성장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미국인 경제 회복 체감 못해 데이터 상 미국 경제의 이러한 강력한 모습을 일반 국민들은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무엇보다도 일련의 금리 인상 조치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잡히지 않는 고물가와 주택시장의 침체 등 경제의 불확실성에 대한 우려 때문일 것이다. 고령에 따른 기억력 문제가 최대 리스크로 부각된 상황에서 경제 상황에 대한 일반인들의 부정적인 인식이 지속되면 바이든 대통령에게 치명타가 된다. 현재 공화당 경선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듭하고 있는 트럼프는 바이든의 '치매 리스크'와 경제에 대한 불안감으로 바이든과의 가상 대결에서도 우위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현재 수많은 범죄 혐의에 형사 기소된 트럼프 대통령이 안고 있는 '사법 리스크'도 재판의 진행 결과에 따라 주요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아직 대선이 8개월이나 남은 시점에서 미국 경제의 향후 움직임, 특히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잠잠해지고 금리 인하가 본격화되는 가운데 신규채용 등 고용시장 데이터까지 현재의 견고함이 유지되고 트럼프가 사법 리스크에 발목이 잡힌다면 이번 대선의 향방은 누구에게 유리할지 쉽게 점칠 수 없다. 앞에서 언급한 놀라운 실업률 데이터는 현재 미국 경제의 양호한 상태를 알려주는 여러 지표들 중에서 단지 하나에 불과하다. 미국의 대표적 상장 기업을 추종하는 S&P500 지수는 기록 경신을 거듭하면서 근로자들의 401k 퇴직 연금 계좌도 두툼해지고 있다. 미국에서 대통령은 경제가 나쁘면 지나치게 비난을 받고 경제가 좋아질 경우 충분한 찬사를 받지 못한다는 오랜 정치적 격언이 있다. 바이든이 후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번 대선의 주요 이슈로 남부 국경을 통한 불법 이민자 유입 문제 또는 낙태 금지 문제에 대한 찬반 갈등을 비롯 여러가지가 거론되고 있다지만 현재의 경제상황에 대한 유권자들의 인식은 승부를 가를 가장 결정적인 요소라 할 수 있다. 1992년 빌 클린턴 민주당 후보는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It's the economy, stupid)'라는 캐치 프레이즈를 유행시키며 현직 대통령이던 조지 H. 부시 후보를 물리쳤다. 경제는 국민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이고 지도자의 개인적 오점은 눈감아 줄 수 있어도 경제를 망쳐 놓으면 그대로 아웃이라는 미 현대사 선거의 법칙이 이번에도 통할까 관심사이다. 바이든 행정부는 미국 경제가 살아난 것은 '바이드노믹스' 덕분이라고 유권자들을 설득하고 있다. 트럼프는 지지자들에게 바이든이 집권을 계속하면 경제가 얼마 안가 망가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는 현재 증시가 상승하는 이유는 자신의 집권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 금리정책의 키를 쥔 연준이 바이든 지원에 나설 것이라는 음모론까지 언급하고 있다. 현시점에서 연준의 입장은 금리 인하를 시작하려면 인플레이션이 추세적으로 2%대로 다시 내려간다는 확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최근 연방 노동부는 물가를 측정하는 핵심지표인 소비자물가지수(CPI)가 1월에 전년 동월 대비 3.1% 상승했다고 발표했다. 시장은 약 3년 만에 CPI가 2%대에 진입할 것으로 기대했으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인플레에션 압력이 여전함을 드러냈다. 연준이 가장 주목하는 인플레이션 지표인 PCE(개인소비지출) 물가지수는 1월에 전년 동기 대비 2.4% 상승했다. 인플레이션 상승폭이 3년만에 가장 큰 폭으로 둔화된 모습으로 시장에서는 6월 금리 인하 전망이 확산되고 있다. 금리 인하가 시작되면 미국 금융시장에는 호재이다. 일반인들이 싼 이자로 돈을 빌릴 수 있고 무엇보다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높은 고금리 모기지론에 침체된 부동산 시장이 다시 살아날 수도 있다. 미국 경제가 지난해 예상을 압도하는 실적을 냈지만 대부분 국민들은 경제가 아직 살아났다고 느끼지 못하고 있다. 치솟는 물가는 임금 상승을 상쇄하기 때문이다. 최근 CNN 여론조사에 따르면 경제에 대한 인식은 개선되고 있지만 아직도 부정적이다. 절반에 가까운 48%가 미국 경제가 아직 침체라고 믿고 있고 35% 정도만 잘 돌아가고 있다고 믿고 있다. 또 26%는 미국의 경제가 회복되기 시작함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이는 지난해 여름 20%, 2022년 12월의 17%에 비해 높아진 수치이다. 미국인들의 경제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긍정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은 바이든에게 희망의 빛이다. 재집권을 노리는 트럼프에게 열광하고 그에게 표를 주고자 맘먹은 유권자들에겐 트럼프가 바이든보다 경제를 잘 관리할 것이라는 믿음이 강하다. 트럼프는 팬데믹 이전 자신의 집권 시 미국 경제가 역사상 가장 강력한 모습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의 선거 캠페인 사이트는 트럼프 집권 시 미 전역의 가계소득 중간값과 아프리카 흑인들의 실업률이 역사상 최고로 양호한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고 홍보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수치들은 바이든 행정부 집권 이후 더욱 개선되었다. 바이든은 선거 유세에서 자신의 집권 이후 미국이 팬데믹을 극복하고 기록적인 성장세로 세계 경제를 이끌고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둘 중에서 누가 경제를 더 잘 이끌었는가는 훗날 평가에 달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누가 당선이냐에 따라 미국의 대외 무역과 경제정책 기조는 상당한 차이를 보일 전망이다. 트럼프 2기 경제정책 트럼프는 바이든보다 보호주의 무역에 대한 신념이 훨씬 강한 인물이다. 그는 관세가 미국의 무역적자를 줄이고 오랫동안 침체된 국내 제조업을 활성화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트럼프 1기 집권 시 무역전쟁보다는 법인세 대폭 감세(35%→21%) 등 세제개혁이 최우선 경제 어젠다였다면 2기는 무역전쟁이 우선순위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트럼프는 자신이 다시 집권하면 현재 3% 아래인 '보편적 관세(universal baseline tariff)를 10%로 끌어올릴 것이라고 공언해왔다. 아직 구체적인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트럼프는 모든 나라에 10%의 관세를 일괄적으로 통일하는 것보다는 무역 상대방에 따라 개별 협상을 통해 양보를 얻어내고 대신에 관세를 낮추어주는 전략을 구사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출범하면 경제분야에서 핵심 브레인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이는 로버트 라이트하이저(Robert Lighthizer) 전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트럼프가 말하는 '10% 보편적 관세'는 기존 관세에 추가로 10%가 적용되는 방식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트럼프가 당선 시 대통령 마음대로 일방적으로 고율의 관세를 부과할 수 있게 한 미국 관세법의 338조(1933년 제정)를 소환할 가능성까지 제기하고 있다. 2018년 중국의 불공정 경제 관행과 무역수지 불균형을 이유로 특정제품에 대해 25%의 관세를 부과해 미·중 관세전쟁을 야기했던 트럼프는 중국에 대한 공세 수위를 더욱 높일 것으로 보인다. 그의 재집권 시 대중 관세율을 60%로 일괄 적용할 것이라는 보도까지 나오고 있다. 중국이나 EU 등 미국의 주요 무역 파트너들은 트럼프의 관세 폭탄을 그냥 보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 각국의 보복조치와 공급망 교란에 세계 경제가 크게 흔들릴 가능성이 크다. 이럴 경우 대외무역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는 상대적으로 큰 대외적 위기에 몰릴 것으로 예상된다. 동맹국이라도 미국의 이익이 없는 곳에 일방적 안보 지원을 하지 않겠다는 트럼프는 현재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2개의 전쟁을 미국이 어떻게 할 것인지 구체적인 대응 방안을 아직 밝히지 않고 있다. "재정적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는 나토 동맹국을 러시아가 공격하도록 부추길 것"이라는 트럼프의 최근 발언은 그가 동맹의 가치까지 훼손하고 자국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인물임을 전 세계에 다시 한번 각인 시켜주었다. 여러가지 상황을 종합해 보면 트럼프의 집권 시 미국은 국방비를 늘릴 수밖에 없다. 세계 도처에서 적들의 도전을 물리치거나 새로운 전쟁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바이든의 IPEF(경제태평양프레임워크) 공급망 협정도 휴지조각으로 만들고 파리 기후 조약의 탈퇴도 가시화될 가능성이 크다. 세계 공급망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국내에서 석유 등 에너지 생산을 크게 늘릴 것이다. 또한 반이민정책을 더욱 강화할 것이다. 모든 것이 그의 "아메리카 퍼스트'라는 구호 아래에서. 트럼프 1기 정부에서 너무 매파적이라는 이유로 파면된 존 볼턴 전 국가안보보좌관은 2020년 회고록에서 "그의 첫 4년은 나빴다면 , 두 번째 4년은 더 나쁠 전망"이라며 "트럼프는 자신에 대한 보복에만 관심이 있으며, 이는 두 번째 임기의 대부분을 소비할 것"이라고 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바이드노믹스'의 경제적 성과에 대한 미국 유권자들의 인식이 우선 바뀌길 고대할 것이다. 또 세계 안보·통상 질서와 관련 트럼프 2기에 대한 국제적 우려를 선거 전략으로 부각시키며 트럼프와의 결전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 2024-03-03 11:46:39
- [이수완의 월드비전] 러-우크라 전쟁 2년 …버티는 자가 이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이 2년을 곧 넘긴다. 러시아는 전쟁 초 우크라이나군의 강력한 저항에 밀려서 수도인 키이우 점령에 실패했다. 그러나 남부의 전략적 요충지 마리우폴을 포위 공격해 함락시키고 동부의 거점인 세베로도네츠크(Severodonetsk)와 리시찬스크(Lisichansk)를 차례로 점령했다. 현재 러시아는 동부 돈바스(도네츠크와 루한스크를 아우르는 지역) 지역 대부분을 포함해 우크라이나 영토를 대략 20% 장악하고 있다. 또 2014년 강제 합병한 크림반도와 러시아 본토를 연결하는 육로를 점령하고 있는 것도 큰 성과로 꼽고 있다. 지난가을 내내 탄약과 미사일을 비축한 러시아는 새해 들어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지난 수개월 동안 미 정보당국은 러시아가 북한에서 들여온 미사일을 우크라이나 공습에 사용한 정황을 여러 차례 포착했다.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전략소통조정관은 지난 24일(현지시간) 브리핑에서 "북한이 러시아를 통해 우크라이나 전장에서 자신들의 첨단 군사 역량을 실험하며 강화하고 있다"고 밝혔다. 북한이 우크라이나 전장에 새로운 변수로 등장한 것이다. 반면 우크라이나는 서구 우방에서 제공하는 탄약과 미사일의 공급 차질로 대부분 전선에서 방어 모드에 돌입한 형국이다. 최근 무기 조달과 관련해 전·현직 국방부 고위 관리들이 거액의 횡령 비리에 연루되어 조사를 받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이다. 러시아 침공에 대한 서방 국가들의 각종 제재는 별다른 충격을 주지 못했다. 전시 경제 체제에도 불구하고 고용과 소비수요 등 러시아 경제의 각 부문은 되레 살아났다. 중국과 연대를 강화하면서 미국 중심의 국제 금융시스템에 도전하고 교역과 생필품 조달 문제도 해결했다. 전쟁 초기 거셌던 반전 여론도 확산되지 않고 있다. 러시아가 굳이 전쟁을 서둘러서 끝내야 할 이유가 없는 셈이다.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으로 미국이 이미 두 개의 전선을 동시에 지원하고 있는 것도 러시아에는 유리한 상황이다. 특히 트럼프와 바이든의 '리턴매치'가 예상되는 11월 미 대선을 앞두고 정치적으로 양극화된 미국의 우크라이나 방어에 대한 분명한 전략과 의지도 시험대에 올라 있다. 장기전을 수행하려면 충분한 자원 확보와 인내심이 중요하다. 러시아가 느긋하게 장기 소모전에 대비하고 있는 가운데 우크라이나에 대한 서방의 자금 지원은 난항을 겪고 있다. 지난해 바이든 행정부가 의회에 승인을 요구한 우크라이나에 대한 614억 달러 규모(약 81조원)의 추가 자금 지원안은 미국 남부 지역 국경통제 강화 법안의 우선적 처리를 요구하는 일부 강경파 공화당 의원들에게 발목이 잡혀 있다. 유럽연합(EU) 27개국이 지난 12월 브뤼셀 정상회의에서 논의한 500억 유로(약 72조원) 상당의 우크라이나 장기 지원안도 헝가리가 거부권을 행사하며 제동을 걸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개전 후 3번째 미국을 방문해 미 의회 지도부에 신속한 지원을 호소했지만 공화당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공화당은 미 대선을 앞두고 우크라이나 지원을 위한 법안 통과를 방해하며 바이든의 재선을 견제하는 효과를 노리는 듯하다. 지난 12일 영국 리시 수낵 총리가 우크라이나 키이우를 예고 없이 방문해 올해 최대 25억 파운드(약 4조2000억원) 규모의 군사 지원을 약속하면서 우크라이나는 한숨은 돌리게 됐다. 우크라이나에는 가뭄에 내린 단비였다. '전략적 이니셔티브' 푸틴 대통령은 최근 공개석상에서 러시아가 이번 전쟁에서 '전략적 이니셔티브'를 잡고 있다며 의기양양했다. 지난여름 우크라이나의 대반격이 실패하면서 푸틴의 자신감은 커진 듯하다. 이번 전쟁은 러시아나 우크라이나 모두에 엄청난 인명과 재산 피해를 가져왔고 유럽 안보는 물론 공급망 질서와 세계 경제에 불안감을 확대시켰다. 전쟁에 대한 피로도가 높아진 유럽의 일부 국가들은 현재 형성된 전선을 토대로 양국이 종전 협정을 맺을 것을 압박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미국도 우크라이나 전쟁 목표를 '완전한 승리'에서 '종전 협상' 시 '유리한 위치 확보'로 기울고 있다고 미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보도하기도 했다. 현재 젤렌스키 대통령은 종전의 조건으로 우크라이나가 크림반도 등 러시아의 점령지를 모두 되찾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EU 회원국인 슬로바키아 총선에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 중단과 함께 친러시아 정책을 표방해 승리한 로버트 피코 총리는 최근 라디오 인터뷰에서 전쟁을 끝내려면 우크라이나는 소련이 점령한 영토를 일부라도 포기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 러시아가 돈바스와 루한스크를 떠나는 것? 아니면 크림반도를? 이는 너무 비현실적이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푸틴 대통령도 미 고위 당국자들에게 최근 비공식 채널을 통해 종전을 위한 논의에 열려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고 외신은 보도하고 있다. 소련 해체 후 냉전의 산물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동진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겠다는 명분으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푸틴 대통령도 현시점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출구전략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을 듯하다. 그는 2년 전 우크라이나 수도를 수 주 안에 함락해 젤렌스키 정권을 축출하려 했지만 예상치 못한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체면을 구겼다. 수십 년간 군사적 중립국을 지키던 스웨덴과 핀란드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석 달 뒤 나토 가입 신청서를 내면서 푸틴을 더욱 궁지로 몰았다. 지난해 5월 핀란드는 나토의 31번째 회원으로 가입이 확정되었고 스웨덴도 헝가리의 비준만 거치면 가입이 확정된다.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운 트럼프 행정부 시절 무기력했던 나토 동맹국들은 전쟁 발발 이후 미국의 주도하에 결속을 강화했다. 나토 회원국은 지난주 러시아의 침공에 대비한 '확고한 방어자(Steadfast Defender) 2024' 훈련을 개시해 5월까지 진행한다. 이번 훈련에는 31개 회원국과 스웨덴에서 약 9만명의 병력이 참가한다. 러시아는 나토의 확장으로 인한 안보위기 해결을 명분으로 시작한 전쟁이 나토 결속과 무력시위라는 역풍을 맞고 있는 것이다. 종전 협상 지난여름 영토 수복을 노리던 우크라이나의 대반격이 성과를 내지 못하면서 장기소모전 양상으로 변한 이 전쟁은 어떤 결말을 보일지 미지수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서방에 더 많은 군사적·재정적 지원을 요구하고 있지만 그러한 지원들의 정당성을 입증해야 하는 상황으로 몰리고 있다. 특히 미국의 대선 정국이 본격화되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된다면 바이든이 추구하는 동맹 외교가 실종되어 국제질서의 혼란이 더욱 가중될 것이라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서방의 압력에 의해 우크라이나가 종전 협상에 나선다 해도 이번에 러시아가 점령한 영토의 일부라도 포기할까 미지수이다. 푸틴은 전쟁의 종식을 서두르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공세를 늦추지 않으면서 협상이 성사되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전쟁을 끝내려 할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국내외 상황이 자신에게 불리하지 않을 것으로 믿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서방 분석가들은 러시아군이 전쟁 초 신속하게 키이우를 점령해 푸틴의 꼭두각시 정권을 세우지 못할 경우 일련의 강력한 서방 경제 제재 때문에 심각한 경기 침체에 빠지고 전쟁에서 오랫동안 버티지 못할 것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자국의 원유 수출을 대부분 중국과 인도로 돌리고 러시아에서 철수하는 서방 기업들을 헐값에 사들이면서 전시경제 체제를 구축했다. 지금 서방의 제재를 비웃듯 음식점과 마트엔 고객이 넘치고 러시아인들의 경제 활동은 전쟁 전하고 크게 달라진 게 없다. 연금과 근로자의 임금 인상률도 인플레이션 상승분을 초과하고 있다. 최근 여론 조사에서 우쿠라이나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협상을 선호하는 러시아인들이 아직 다수이지만 현재 푸틴에 대한 지지율이 80% 선에서 고공 행진을 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난해 러시아 경제는 3% 이상 성장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방위 산업의 호황으로 고용 상황도 개선되었다. 전쟁이 러시아의 경제 성장률에서 3분의 1 이상 기여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러시아 대선 향후 전쟁의 향방을 결정하는 변수는 선거이다. 자신의 5번째 대통령 임기에 도전하는 푸틴(71)은 3월 대선을 앞두고 우크라이나 주요 도시에 대한 대규모 공습을 강화하며 러시아가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다고 선전하며 국내 정치적 효과를 극대화할 것으로 보인다. 우크라이나도 올해 대선을 치를 예정이지만 현재 계엄령을 연장하며 선거를 유예하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영토 중 일부는 러시아에 점령당했고 우크라이나 국민 수백만 명이 고향에서 이탈한 상황이라 선거를 실시하지 않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다. 지난해 러시아의 대표적 용병 집단 바그너 그룹의 반란으로 푸틴 정권은 한때 위기를 맞았지만 반란 2개월 만에 수장인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항공기 추락 사고로 숨진 후 더 이상 푸틴 정권을 위협하는 사태는 포착되지 않고 있다. 푸틴은 이번 대선에서 압도적 승리를 통해 우크라이나 침공을 합법화하려 할 것이다. '러시아 제국'의 부활을 꿈꾸는 푸틴이 승리하면 2030년까지 집권을 계속 하면서 소련의 악명 높은 독재 통치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29년 통치(1927~1953년) 기록도 깬다. 트럼프와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푸틴 대통령은 미국 대선에서 바이든 대통령에게 불리한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 전쟁을 오래 끌고 갈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러시아는 자국 내 무기 생산 부족분을 메꾸기 위해 북한에서 무기를 지원받는 방법을 택했다. 푸틴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해 9월 러시아 아무르주에서 정상회담을 하고 "우크라이나에서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는 데 함께하겠다"고 결의했다. 북한으로서는 그동안 테스트에 그쳤던 단거리탄도미사일을 우크라이나에서 실제 사용해보고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러시아는 북한에서 지원받은 탄약과 미사일로 우크라이나 전쟁을 더 오래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다. 북한은 무기 제공 대가로 러시아에서 전투기나 장갑차, 핵잠수함 등 첨단무기의 도입을 모색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뉴욕의 뉴스쿨(The New School)의 국제문제 교수인 니나 흐루시세바(러시아 태생 미국인)는 최근 기고문에서 향후 우크라이나 전쟁의 세 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첫째는 서방이 우크라이나애 대한 지원을 재약속하지만 미국에는 공화당, EU에는 헝가리라는 장벽이 있다. 이 장벽을 넘더라도 우크라이나는 전장에 투입할 새로운 병력 모집에 애를 먹는다. 두 번째 시나리오는 나토가 우크라이나에 지상군을 투입하는 일이다. 러시아가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면 다른 EU 국가를 침공할 것이라는 명분으로 나토군의 진입이 정당화될 수는 있지만 러시아군이 총력 대응으로 맞서면서 유럽이 더욱 혼란에 빠질 수 있다. 세 번째 시나리오는 서방이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정복당한 영토를 모두 되찾기는 힘들 것이라는 냉혹한 현실을 인정하고, 우크라이나 방어에 집중하면서 러시아와 현실적인 대화를 모색하는 일이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 2024-01-30 10:55:10
- [이수완의 월드비전] 바햐흐로 '슈퍼 선거'의 해 …지정학적 쓰나미 공습 대비할 때 '폴리코노미'(politics+economy) 2024년은 지구촌 '슈퍼 선거'의 해이다. 당장 이번 달에만 방글라데시와 대만에서 선거가 있다. 다음 달에는 파키스탄과 인도네시아에서 총선과 대선이 실시된다. 3월에는 러시아 대선과 이란 총선이 있고 우리나라도 4월 10일 22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있다. 곧바로 세계 1위 인구대국 인도의 총선이 이어진다. 빽빽한 선거 일정은 11월 5일의 미국 대선이라는 정점에 다다른다. 공화당은 오는 7월 중순 위스콘신주 밀워키에서, 민주당은 8월 중순 일리오이주 시카고에서 각각 전당대회를 열고 당 대선 후보를 최종 선출한다. 예상대로 민주당에서 바이든 대통령이, 공화당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이 각각 후보로 확정된다면 2020년에 이어 두 사람의 '리턴 매치'가 열린다. 올 한해 동안 총선이나 대통령을 뽑는 전국 단위의 투표가 40여 개 국가에서 실시된다. 전례없이 연쇄적으로 실시되는 지구촌의 선거는 그 결과에 따라 세계 권력 지형도는 물론 외교·안보·무역 등 정책의 기조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블룸버그이코노믹스의 수석애널리스트 제니퍼 웰치의 분석처럼 2024년은 "지정학적 관점에서 100년 만에 가장 역동적인 해"이다. 지난해 3년 넘게 전 세계를 공포로 옭아 맨 팬데믹의 종식선언이 있었다. 하지만 국제 정세가 신냉전 체제로 재편되면서 군비경쟁과 지정학적 위험 요소가 확대되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다음 달 24일이면 2년을 넘긴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를 완전히 격퇴할 때까지 전쟁을 이어갈 방침을 굽히지 않고 있다. 세계의 화약고로 불리는 중동의 위기까지 장기화 되면서 국제사회의 갈등과 충돌은 가속화되고 있다. 미국의 이스라엘 지원으로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이 줄어들며 유럽의 전쟁은 기로에 서있다. 지난 3년간 인플레이션과 전쟁을 치른 세계 경제는 아직 정상궤도에 오르지 못한 가운데 미·중 무역 갈등이 심화되고 배타적 공급망 체제가 공고히 구축되고 있다. 이렇게 급변하는 환경에서 치러지게 되는 선거와 정치적 후폭풍은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을 더욱 키울 수밖에 없다. 올해는 정치가 경제를 지배하는 '폴리코노미'(politics+economy) 현상이 두드러진 한 해가 될 전망이다. 선거 달력을 펼쳐보자. 우선 이번 달 7일 실시되는 방글라데시 총선은 올해 지구촌 첫 선거로 주목받고 있다. 총선을 앞두고 야당 정치인이 대거 투옥되고 반정부 시위가 유혈사태로 이어지면서 정국의 혼란이 계속되고 있다. 제1야당 방글라데시민족주의당(BNP)의 선거 보이콧 선언으로 집권 아와미 연맹의 셰이크 하시나 총리의 재집권이 점쳐진다. 하시나 총리는 방글라데시 초대 대통령 세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의 딸로 1990년대 한 차례 총리를 지냈고 2009년부터 다시 집권해 지금까지 19년째 집권하고 있다. 1월 13일에는 양안(兩岸·중국과 대만)의 운명을 좌우할 대만 선거가 있다. 총통과 부총통, 그리고 의회인 입법원 위원들을 뽑는 선거가 같이 실시된다. 대만과의 일국양제 통일을 강조하는 중국과 대만의 민주주의 수호를 외치는 미국과의 대리전이다. 최근 여론 조사 결과는 집권당인 친미 성향 라이칭더(민진당)가 선두에 나서 친중 성향인 야권의 허우유이(국민당)의 추격을 뿌리치고 있다. 선거에서 누가 승리하느냐에 따라 향후 양안 관계는 물론 미·중 관계, 동북아 정세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 민진당이 재집권에 성공한다면 중국은 군사력을 포함해 막강한 힘을 과시하는 방식으로 대만의 새 정부 길들이기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 2월에는 회교 국가인 파키스탄과 인도네시아에서 일주일 간격으로 선거가 실시된다. 파키스탄은 '크리켓 스타' 출신 야당 지도자인 임란 칸 전 총리가 지난해 5월 자산은닉 혐의로 투옥되고 이번 총선에 출마하지 못하면서 정국 불안이 커지고 있다. 2억여 명의 유권자가 있는 인도네시아는 지지도가 높은 조코 위도도 대통령이 3선 연임 제한으로 2월 14일 실시되는 대선에 출마를 못한다. 인도네시아는 1990년대 후반 수하르토 군사독재정권이 축출된 후 숱한 우여곡절을 넘기며 민주주의를 정착시켜 왔다. 이번 대선에서는 민주항쟁당의 간자르 프라노워 후보와 2014, 2019년 위도도 대통령과의 양자대결에서 연속 패배했던 프라보워 수비안토 국방장관이 접전을 벌이고 있다. 특이한 것은 위도도 대통령의 장남 기브란 하카부밍 라카가 수비안토 후보의 러닝 메이트로 출마한다. 조코위의 라이벌이었으나 국방장관에 임명되면서 파트너로 변한 프라보워 수비안토 후보는 수하르토 정권 시절의 인물이다. 인도네시아 민주화의 수혜자이자 상징적 인물인 조코위 대통령이 아들을 슬그머니 수비안토 후보의 러닝메이트로 들이밀었다 해서 논란이 일고 있다. 푸틴과 모디 3월의 러시아 대선도 국제정세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지난 2020년 개헌 국민투표로 ‘재집권 정당성’을 획득했다. 현재로서는 5번째 대통령 임기에 도전하는 푸틴의 6년 집권 연장이 당연시되는 분위기다. 그가 당선되어 그의 나이 78세가 되는 2030년까지 집권하면 과거 구 소련을 철권 통치했던 스탈린의 장기 집권 기록을 뛰어넘는다. 푸틴의 최대 정적으로 불리는 야당 지도자 알렉세이 니발니는 투옥 중이다. 푸틴이 이번 선거에서 압도적 지지율로 당선 된다면 그는 과거 러시아 제국의 영광을 찾기 위한 국가재건 노력에 박차를 가하면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의 정면대결을 불사할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일각에서는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전쟁을 11월 미국 대선까지는 끌고 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란에서는 2020년 이후 4년 만인 3월 1일 총선이 실시된다. 야당 후보자 중 25% 이상이 이미 자격을 상실했고 많은 유권자가 투표를 보이콧할 것으로 보인다. 전 세계 가장 인구가 많은 국가인 인도는 4월과 5월 한달 반 동안이나 기나긴 총선을 치른다. 지난 2014년 취임한 나렌드라 모디 총리는 2019년 재선에 성공했다. 친기업 시장친화적인 정책과 미·중간 줄다리기 외교를 펼친 모디 정권의 인도는 지난 10년 경제규모가 세계 10위에서 5위로 올라섰다. 현재 국정 지지율이 70%를 넘는 그는 자신의 세 번째 임기 내에 독일과 일본을 제치고 세계 3위로 도약시킬 것이라며 표심을 겨냥하고 있다. 힌두국수주의 성향의 집권 인도인민당(BJP)은 지난달 치러진 지방선거 5개 주 가운데 3개 주에서 승리해 3연임을 노리는 모디 총리에게 청신호를 켜주었다. 5월에는 아프리카 남아공의 선거가 치러진다. 1994년 아파르트헤이트(흑백 인종 차별 정책) 종식 이후 민주화의 아버지인 넬슨 만델라가 몸담았던 ANC(아프리카민족회의)는 남아공을 30년 동안 집권해왔다. 그러나 장기집권에 대한 피로감과 최악의 경제난과 높은 실업률과 빈부격차로 ANC가 의석의 과반을 차지할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 ANC는 사상 최악의 전력난과 높은 실업률, 갈수록 커지는 빈부 격차 등으로 지지율이 계속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밖에 올해 아프리카에서는 알제리, 튀니지, 가나, 르완다, 나미비아, 모잠비크, 세네갈, 토고, 남수단이 선거를 치른다. 6월이 되면 5년마다 실시되는 유럽의회 선거가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이후 처음 실시된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피로감과 최근 유럽 극우정당의 약진 기조가 이번 선거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궁금하다. 유럽의회 선거에서 극우파 분위기가 강해질 경우 유럽 내 무역장벽은 확산될 전망이다. 선거 이후 유럽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과 러시아에 대한 제재, 이민 문제, 기후변화 정책과 대중 관계 등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주목을 받고 있다. 브렉시트 이후 ‘정권교체’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영국은 늦어도 2025년 1월까지 총선을 치러야 하는데 올가을 총선이 유력해 보인다. 최근의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리시 수낵 총리가 이끄는 보수당과 비교해 야당인 노동당의 지지율이 20%p 정도 앞서는 것으로 나타난다. 브렉시트 이후 가중되고 있는 경제적 고통과 정치적 혼란에 지친 젊은 유권자들의 표심이 움직인 결과로 보인다. 수낵 총리는 상속세 폐지를 포함한 대규모 감면책을 고려하고 있다. 지난해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중남미는 올해 멕시코와 베네수엘라에서 선거가 실시된다. 인기가 높은 현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르도 멕시코 대통령은 연임 금지조항에 6월 2일의 대선에 출마를 할 수 없다. 멕시코시티 첫 여성 민선 시장으로 좌파 여당인 국가재건운동(모레나)의 대권 후보가 된 클라우디아 셰인바움이 멕시코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될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우파 야당 연합체인 '광역전선' 후보도 여성이라 멕시코의 차기 대통령은 여성 대통령이 확실하다. 10월에는 베네수엘라 대선이 있다. 미국의 압박과 경제난 속에서도 10년 넘게 권력을 유지하고 있는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또 출마한다. 주요 야권 후보들의 출마가 봉쇄되어 그의 당선이 유력한 상황이다. 이스라엘에서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기습 공격을 막지 못한 베냐민 네타냐후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비판이 커지면서 올해 예정되지 않았던 선거가 치러질 수도 있다. 가까운 이웃 일본에서는 올해 집권여당 자민당의 총재선거에 따라 총리가 바뀔 수 있다. 올해 9월까지 임기인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도 최근 지지율이 급격히 하락하며 퇴진 위기에 몰린 상황이다. 일본과의 관계개선 그리고 한·미·일 3자 안보협력에 기초한 현 윤석열 정부의 외교 정책에 어떤 변수로 작용할지 주목이 된다. 무엇보다도 미 대선은 그 결과에 따라 미국의 정치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수 있다. 트럼프 리스크 영국의 시사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2024년 대전망 보고서에서 세계를 위협하는 가장 큰 위기는 ‘트럼프’의 재집권이 될 것이라고 했다. 현재 트럼프 전 대통령은 각종 범죄 혐의로 4건의 형사사건에 기소돼 있다. 11월까지 펼쳐지게 될 선거 기간 내내 ‘사법 리스크’가 트럼프 전 대통령을 따라다닐 수밖에 없다. 바이든 대 트럼프. 올해 미국 대선에서 이 구도를 또 보게 될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 전 세계는 ‘트럼프 집권 2기’가 몰고 올 정치적 경제적 지각변동의 리스크를 분석하고 있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와 일방주의에 바이든 대통령이 다시 구축하고 있는 동맹 국가들과의 유대 관계는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 있다. 중국을 겨냥한 미국 주도의 경제협력체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나 안보체제인 오커스(AUKUS)는 유명무실해지고 ‘집단 안보’를 핵심으로 하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미래도 불투명해진다. 또 바이든의 핵심 경제 정책인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이 백지화 된다면 미국 내 투자를 늘려왔던 우리 기업들은 낭패를 볼 수도 있다. 중국과의 경제적 충돌이 확대되고 보호주의 무역정책이 강화되어 글로벌 경제에도 큰 타격을 입히게 될 것이다. 트럼프의 재집권은 필연적으로 미국과 전 세계에 큰 혼란을 야기하게 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경제가 어려워지면 안보도 위태롭게 된다. 유럽과 중동에서 발생한 두 개의 전쟁과 별도로 국지적 안보 불안은 다른 지역으로 전이될 수 있다. 특히 유사시 미국의 대만해협 수호를 위한 의지가 약화될 경우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 불안은 심각한 수준으로 커질 수 있다. 우리 정부는 올해 각종 세계 선거를 통해 나타날 세계 질서의 변화와 각국의 이해 관계를 면밀히 분석해 대한민국의 국제적 입지 강화와 리스크 관리에 큰 힘을 쏟아야 한다. 필요하다면, 우리의 외교·안보·통상 전략을 여러가지 시나리오에 맞춰 일부 또는 전면 수정하는 것도 검토해야 할 것이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 2024-01-01 14:40:54
- [이수완의 월드비전] 정치 이단아의 극약처방 아르헨티나 경제 살려낼까 지지자들에게 인사하는 밀레이 아르헨 대통령 당선인 르헨티나 대선 결선 투표일인 19일(현지시간)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 당선인이 부에노스아이레스 투표소를 찾아 투표한 뒤 지지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주 아르헨티나 대통령 선거 결선투표에서 극우 성향인 하비에르 밀레이 후보(53)가 좌파 집권당 후보를 누르고 승리했다. 선거 결과를 두고 주요 외신들은 아르헨티나의 극심한 경제난이 '무정부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며 혜성처럼 나타난 정치 이단아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고 분석했다. 집권 좌파와 우파 야당까지 기성정치인의 무능과 부패에 지친 유권자들은 부스스한 장발에 가죽 재킷을 입고 거침없는 입담에 기행을 마다하지 않는 '아웃사이더' 후보에게 열광했다. 그만큼 나라 경제가 심각하다는 방증이다. 경제학자 출신 방송인으로 불과 2년 전 정치에 입문한 밀레이 당선인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기성 정치인을 모두 싸잡아 비판하며 표를 결집했다. 난파 위기에 처한 경제를 구하기 위해 중앙은행 폐쇄, 미국 달러화를 법정화폐로 채택, 정부 부처 대폭 축소와 공공보조금 삭감 등 급진적 조치에 의한 '새판 짜기'를 주장하고 있다. 선거 유세 중 집권 세력의 불필요한 정부 보조금과 복지 혜택을 쳐내야 한다며 전기톱을 휘두르는 퍼포먼스는 큰 화제가 됐다. 낙선한 좌파 집권당 후보 마사 경제장관은 여당 프리미엄을 등에 업은 감세 정책과 보조금 지급 확대로 승리를 노렸지만 경제 파탄에 대해 책임을 묻는 거센 정권 심판론에 압도당했다. 현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정권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아르헨티나 정치사에 깊이 뿌리내린 페론주의(Peronism·후안 도밍고 페론 전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영부인 에바 페론과 펼쳤던 대중영합인 정책과 이념)의 한 분파다. 과거 세계적인 부국이던 아르헨티나는 오늘날 '경제위기'라는 꼬리표를 항상 달고 있다. 선진국 대열에서 탈락한 국가로 제일 먼저 거론되기도 한다. 이러한 아르헨티나의 몰락에 대해 국민을 과도한 무상복지로 중독시킨 '페론주의' 좌파 포퓰리즘에서 찾는 분석이 많다. 그러나 무엇보다 주목할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끊임없이 이어진 페로니스트와 반대 우파 간 극심한 대결이다. 안정적이고 지속 가능한 경제정책은 끝없이 이어지는 대결과 정치 불안으로 인해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표류했다. 밀레이 당선인은 1983년 아르헨티나 민주화 이후 사상 두 번째 비(非)페로니스트 대통령으로 다음 달 10일 취임한다. 2015년부터 4년간 집권했던 기업가 출신 마우리시오 마크리 대통령은 중도 우파로 분류된다. 그는 재임 기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친분을 과시하며 정부의 과도한 지출을 줄이고 기업의 경쟁력을 키우면서 디폴트 국가경제 프레임에서 벗어나려고 애썼지만 국제 금리 상승 여파로 아르헨티나 부채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우려가 확대되고 경제 상황이 더욱 악화되면서 좌절을 맛보았다. 페론주의의 달콤함에 빠져 있던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마크리 정부의 긴축 정책을 반기지 않았다. 밀레이 당선인은 '급진적인 변화'를 통해 19세기에 경제 부국이었던 아르헨티나의 잃어버린 영광을 되찾을 것이라고 공언한다. 그러나 현재 아르헨티나 경제 상황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정도로 암울하다. 만약 그가 공언한 일련의 경제 회생을 위한 극약 처방이 실패로 돌아간다면 페론주의가 되살아날 가능성이 크다. 100년 전만 해도 아르헨티나는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보다 부자 국가였다. '팜파스'로 불리는 비옥한 대평원으로 유럽 이민자들이 대거 몰려와 근대 농업을 수출 산업으로 발전시켜 세계적인 경제 대국으로 급성장했다. 그러나 지난 60여 년간 거의 30차례나 국제통화기금(IMF)에서 구제 금융을 받은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나라가 겪은 경제적 혼란이 얼마나 심각한 모습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아르헨티나는 매년 재정 적자를 메꾸기 위해 중앙은행이 신규 통화를 발행하거나 외국에서 자금을 빌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로 인해 물가는 가파르게 오르지 않을 수 없는 구조다. 가치 폭락으로 휴지처럼 변한 페소화는 이미 법정통화로서 기능이 유명무실해진 상황이다. 30여 년 전인 1992년 화폐 개혁을 단행해 1달러-1페소 페그제를 도입하자 초인플레이션이 어느 정도 잡혔다. 그러나 1999년 경쟁국인 브라질이 헤알화 가치를 하락시키자 달러 강세가 이어지며 수출이 급감하고 외화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면서 경제는 다시 깊은 수렁에 빠지고 만다. 마침내 2001년 모라토리엄 선언에 이어 2002년 달러화 페그제를 페지했다. 밀레이 당선자는 과거와 같은 달러 페그제가 아니고 페소화를 아예 다 없애버리고 미국 달러를 법정통화로 만들자고 주장하고 있다. ‘달러화 채택' 현실화 가능성 낮아 외신들은 ‘달러화 채택 공약’과 관련한 전문가들의 회의적인 시각을 앞다투어 보도하고 있다.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이미 월급 등 소득이 생기는 대로 생필품을 사거나 암시장에서 달러 현금을 모으는 것이 일상이다. 페소화 가치가 하루가 다르게 추락하는 상황에서 현재 아르헨티나는 이를 대체할 만큼 달러를 보유하고 있지 않다. 블룸버그통신은 밀레이 당선인이 공약한 대로 페소화가 달러화로 전환되면 또 다른 초인플레이션이 불가피하다고 전망했다. 자국 화폐를 버리고 미국 달러화를 도입한다는 것은 통화정책을 미국에 의존하게 되고 미국의 '경제식민지'로 전락할 위험도 있다. IMF에 따르면 아르헨티나 경제는 올해 2.5% 역성장이 예상된다. 중앙은행 금리는 10월 현재 133%다. 국민 10명 중 4명이 빈곤에 시달리고 있으며 범죄율도 치솟고 있다. 전문가들은 수출과 투자 확대, 생산성 증대 등 거시경제의 근본적인 안정화가 먼저 이루어져야 달러화 법정통화 채택을 비롯한 아르헨티나 경제의 대수술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중병인 환자를 수술대 올리려면 우선적으로 환자를 안정화시키는 조치가 필수인 것처럼. 미국이라는 초강대국 이웃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중남미 국가들은 원자재나 농축산물 수출에 의존하는 불안한 경제 때문에 극단적 좌파·우파 정치 실험을 반복해왔다. 국제사회 관심이 높았던 이번 아르헨티나 대선에서 친미·반중 성향인 비주류 이단아가 집권하게 됨에 따라 향후 중남미 블록의 대외 노선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특히 아르헨티나 좌파 정권은 아르헨티나 기업이 중국산 제품을 수입할 때 위안화로 결제하게 하는 등 대중 경제협력 확대에 적극 공을 들여왔지만 밀레이 당선인은 중국과는 거래를 하지 않겠다고까지 공언하고 있다. 2015년 집권했지만 경제난 극복에 한계를 드러낸 마크리 전 대통령은 이번 아르헨티나 대선 결선에서 밀레이 당선인을 적극 지지했다. 현지 보수 진영에서는 2000년대 초반 중남미를 휩쓸었던 '핑크 타이드(Pink Tide)'가 마크리 전 대통령 당선 이후 한풀 꺾였던 것처럼 밀레이 당선인이 제2의 핑크 타이드에 제동을 걸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마크리 전 대통령의 우파 세력이 2019년 정권을 페로니스트에게 다시 내주었듯이 향후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중남미 국가들의 정치 지형은 너무 변화무쌍하고 예단하기 어렵다. '핑크 타이드' 제동 '탈냉전'이라는 새로운 국제질서 속에 중남미 극우 독재정권이 연쇄적으로 무너졌다. 이후 1990년대 말부터 2014년까지 남미 12개국 중 파라과이와 콜롬비아를 제외한 10개국에서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좌파 정권이 집권했다. 소위 1차 핑크 타이드의 중심 인물은 우고 차베스(1954~2013) 베네수엘라 대통령이라 할 수 있다. 차베스는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질서와 신자유주의에 반기를 들며 주변 국가들에 대해 반미 사회주의 운동을 지원했다. 베네수엘라 수출액에서 80%를 차지하는 석유로 벌어들인 막대한 오일머니로 무상의료와 무상교육 등 급진적인 포퓰리즘 정책을 펼치면서 4연임에 성공했다. 당시 남미의 좌파정권 대유행을 세계 원자재 가격 급등과 연결시키는 학자들이 많다. 베네수엘라의 석유, 브라질의 철광석, 볼리비아의 주석, 칠레의 구리 등 남미대륙의 풍부한 지하자원은 중국 경제의 급성장으로 수요가 급등했다. 퍼주기 정책으로 집권 장기화를 꾀하던 차베스가 사망한 이후 베네수엘라는 그의 후계자로 지목된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이 계속 집권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의 제재로 경제는 극단적으로 피폐해지고 부정선거 논란과 야당 탄압으로 정치적 혼란이 이어지고 있다. 2015년쯤부터는 국제 원자재 가격 하락으로 인한 재정 파탄으로 신자유주의 물결이 거세지자 아르헨티나·브라질·칠레 등에 우파 정권이 속속 들어섰다. 그러나 2018년 멕시코에서 출범하기 시작한 좌파 정권은 2019년(아르헨티나), 2020년(볼리비아), 2021년(페루, 온두라스 ,칠레), 2022년(브라질, 콜롬비아), 2023년(과테말라)에도 이어졌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경기 침체 국면에서 중산층 소득이 감소하고 실업자와 취약계층이 늘어나며 민심이 다시 좌향좌를 선택한 것이다. 특히 미국의 든든한 우방이었던 콜롬비아에서는 극심한 경제난으로 지난해 역대 처음으로 좌파 정권이 탄생하기도 했다. 지난해 브라질에서 세 번째 임기를 시작한 룰라 다 시우바 대통령은 현재 중남미 좌파의 상징적 인물이다. 과거 8년 집권 기간 부채에 허덕이던 브라질 경제를 살린 인물로 2010년 퇴임 당시에도 높은 인기로 구가했다. 2018년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됐으나 2021년 대법원의 무죄 판결 확정으로 대선에 다시 출마해 '브라질의 트럼프'로 불렸던 전임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을 1.8%포인트 차이로 힘겹게 이겼다. 브라질은 과거 중국의 수요 증가로 안정적 재정을 확보했지만 현재 브라질 경제 상황은 급박하다. 정치적·사회적 양극화가 극심해진 가운데 노동력 고령화, 공공부채 등 풀어야 할 숙제들이 너무 많아 룰라 대통령이 과거와 같은 높은 인기를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미·중 간 패권경쟁이 격화하면서 중남미 대다수 국가들은 비동맹 외교 노선으로 위험 관리에 나서고 있다. 지난 5월 룰라 대통령은 중국에 대만해협 평화와 안정을 촉구하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난했던 히로시마 G7 정상회의에 참석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와 칠레 등과 함께 미국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장비 지원 요구를 거절했다. 지난 20여 년간 핑크 타이드의 유행과 퇴조를 모두 경험했던 중남미 지도자들은 과도한 복지정책이 선거의 필승 공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게 되었다. 그래서 분명해 보이는 것은 중남미 국가들이 과거와 같이 무조건 이념적 깃발 아래 똘똘 뭉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좌우를 떠나 중남미 국가 지도자들은 과거처럼 이념에 몰입되기보다는 원자재 대체산업 육성 등 실리적 접근을 통해야 국가 경제 파탄을 면할 수 있는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 2023-11-28 14:12:51
- [이수완의 월드비전] AI 대전환기 … 애덤 스미스가 살아 있다면 [애덤 스미스, 위키백과] 애덤 스미스 (Adam Smith; 1723~1790)는 '근대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산업혁명이라는 역사적 대전환기에 그는 경제학자로서 뿐 아니라 뛰어난 도덕 철학자로 인류 역사에서 굵직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올해가 탄생 300주년으로 전 세계는 그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그가 남긴 업적을 다시 짚어보고 있다. 애덤 스미스는 스코틀랜드 동부 해안의 소도시 커콜디(Kircaldy)에서 태어났다. 그곳 세관에서 감사관을 역임했던 아버지는 애덤 스미스가 유아 세례 받기 약 6개월 전 세상을 떠났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어머니와 사촌누이의 돌봄을 받으며 살았다. 어릴 때 몸이 허약하고 말까지 더듬어 얼뜨기라는 조롱을 듣기도 했지만 항상 책을 가까이하는 범상치 않은 수재로 알려져 있다. 14세의 나이에 영국의 유서 깊은 명문 글래스고 대학교에 입학해 철학을 공부했다. 17세 때 옥스퍼드 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가 학풍이 맞지 않아 중퇴했다. 이후 그는 글래스고 대학에서 도덕철학을 가르치고 명예총장까지 지냈다. 그가 살던 시대 경제는 철학의 하위 분야로 취급되어 경제학이라는 학문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스미스는 경제학을 독립된 학문으로 출발하게 만들어낸 인물이다. 안타깝지만 우리가 접하고 있는 애덤 스미스에 관한 정보와 지식은 매우 단편적이다. 평소 너무 겸손했던 그는 임종을 할 때 미발표된 자신의 많은 글(20권 분량)을 모두 불태웠기 때문이다. 그를 제대로 이해할 만한 소중한 정보들이 모두 사라진 것이다. 아직도 애덤 스미스의 일부를 그의 전부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하여 그에 대한 논쟁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애덤 스미스가 남긴 2권의 책 1751년, 불과 28세의 나이에 모교 글래스고 대학의 교수로 임명되어 12년 동안 도덕 철학 강좌를 맡았다. 그의 생애 우리에게 남긴 책은 딱 두 권이다. 하나는 인간 본성 또는 윤리에 대한 분야이고 다른 하나는 경제학 분야로 둘다 출간되자마자 국제적인 명성을 안겼다. 봉건주의가 무너지고 산업혁명으로 근대 자본주의가 꿈틀거리기 시작할 때 애덤 스미스는 두 저서를 통해 급변하는 시대적 상황을 꿰뚫어 보며 자신이 그리던 이상적 가치를 세상에 제시했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새로운 기술 시대 진입으로 지금은 애덤 스미스가 살던 시대와 마찬가지로 경제 패러다임의 대전환 시기이다. 그가 지금 살아있다면 어떤 진단과 처방전을 내릴까? 많은 사람들이 지금 스미스를 소환하고 있다. 그러나 마치 성경에 담겨있는 예수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처럼 여러가지 해석이 나오고 있다. 이는 그가 출간한 두 권의 책 말고는 딱히 그를 심층 분석할 만한 자료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그의 주장이 모호해 역설적으로 후대 많은 학자들이 각기 다른 해석으로 그를 추종하고 있는 것이다. 1759년, 스미스는 대학에서 가르친 강의 내용을 정리해 <도덕감정론> (The Theory of Moral Sentiment)을 출간했다. 그의 나이 36세 때였다. 인간은 지나친 이기심과 탐욕을 내려놓고 사회적 존재로서 도덕적인 행동을 한다는 주장을 펼친 이 저서는 스미스에게 성공의 길을 열어주었다. 유럽 전역에서 유명세를 탄 스미스는 교수직을 사임한다. 당시 유럽의 상류층 자제들은 세상을 돌며 견문을 익히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스미스는 찰스 타운젠트 공작의 양아들 햄리 스커트와 함께 그랜드 투어를 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유럽의 쟁쟁한 사상가들과 만나 지식과 사고의 폭을 넓히면서 드문드문 작성한 견문록(sketching out notes)이 훗날 엄청난 화제가 된 <국부론>( The Wealth of Nations)의 시작이다. 파리에서 만난 프랑스 중농학파 거두이자 루이15세의 주치의 프랑수아 케네(1694~1774)는 스미스의 사상에 큰 영향을 준 사람이다. 케네와의 만남에서 스미스는 사회는 한 인간의 육체와 같고 인간이 노동을 해야 식량과 원료를 얻게 되며 상품을 유통 시켜야 사회가 성장한다는 원리를 깨닫게 된다. 그는 3년 만에 집으로 돌아와 근대 경제학의 교과서로 불리는 '국부론' 집필에 들어간다. 1·2권 총 700페이지에 달하는 국부론은 10년간의 연구와 집필 끝에 나온 역작이다. '국부론'은 그의 생전에도 엄청난 인기를 누렸지만 논쟁도 많았다. 후대에 자신의 저서에 대해 잘못된 해석과 불필요한 오해를 우려해 다른 미발표된 글들을 모두 불태우게 했다는 주장도 있다. <국부론>이 출간된 1776년은 스코틀랜드 출신 발명가 제임스 와트(James Watt, 1973~1819)가 증기기관을 세계 최초로 선보였던 해이기도 하다. 산업혁명 이전까지만 해도 유럽은 수세기 동안 중상주의(mercantilism)라는 경제 이데올로기에 갇혀 있었다. 애덤 스미스는 부의 원천이 금·은과 같은 귀금속이 아니라 노동에 있다고 정의했다. "The property which every man has in his own labor, as it is the original foundation of all other property, so it is the most sacred and inviolable." (모든 사람의 고유한 노동력은 재산을 만드는 근본적인 기초다, 그래서 그것은 가장 신성하며 침범되어서는 안 된다" 스미스가 살았던 18세기의 영국은 산업혁명을 성공적으로 정착시키면서 프랑스나 스페인을 제치고 세계적인 부국으로 등극했다. 자동화 도입으로 대량생산 체제가 가능해졌다. 생산품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며 물건을 팔 수 있는 더 넓은 시장이 필요했다. 자유무역이 확대되고 교통망이 대폭 개선되고 금융산업도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새로운 부유층이 탄생하고 노동 계급의 분화가 시작되었다. 스미스가 대학을 다니고 교수 생활을 했던 글래스고는 부유한 상인들이 세운 스코틀랜드 최대 무역항이자 조선과 해운의 중심지로 아메리카 대륙에서 생산된 담배와 사탕 등이 이곳을 통해 영국으로 들어왔다. 스미스는 이곳의 크고 작은 공장에서 자유 시장의 위력을 목격했다. 그는 이미 상당히 발전된 시장경제사회를 체험한 사람이다. <국부론>의 제1장은 노동의 분업'(division of labor)으로 인한 생산성 증대를 설명한다. 노동 생산성이 증가하며 일반 대중은 과거 대주주나 특권층의 전유물이던 고가의 공산품을 저렴한 가격으로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수송의 발전으로 하천과 연안을 낀 도시들을 중심으로 분업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생산과 유통의 변화뿐 아니라 애덤 스미스가 주목한 것은 사회구조의 근본적인 변화이다. 경쟁이 심화되면서 승자와 패자로 갈린 자본주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막이 오른 것이다. 그는 '경제적 활동의 중심에는 인간의 '이기심'이 자리잡고 있다고 강조했다. 즉, 우리가 빵이나 술 고기를 먹는 것은 가게주인들의 이웃에 대한 자비심 때문이 아니고 각자의 '이기심'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런 '이기심'이 모여 경제가 움직인다고 했다. 한마디로 자유로운 경쟁이 개인과 사회를 부유하게 만드는 동력이라는 것이다. <국부론>은 출간된 지 6개월 만에 초판 1000부가 동이 났고 그의 생전에만 5번의 개정판이 나왔다.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 우리들에게 애덤 스미스 하면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 먼저 떠오른다. 국부론에서 단 한번 등장한 표현이지만 정부의 시장 개입을 반대하고 '작은 정부'를 옹호하는 우파 경제학자들이 자유시장 경제의 비유(metaphor)로 자주 사용한다. 밀턴 프리드먼이나 조지 스티글러 등 신자유주의 사상의 시카고 경제학파들은 다른 해석을 한다. 가격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시장이 자동적으로 효율성을 유지한다는 주장이다. 그리하여 정부가 개입하여 가격을 통제하고 시장 메커니즘을 왜곡해서는 안된다는 논리를 펼친다. 좌파적 성향의 학자들은 자유방임주의(laissez-faire)의 우파 학자들이 애덤 스미스가 제시한 '자유 시장'에 대한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집필하던 시기 영국의 동인도 회사(British East India Company)가 전 세계 무역의 50%를 차지했다. 인도 및 극동지역과의 무역을 촉진하기 위해 국왕의 허가를 받아 조직된 동인도회사는 군대까지 갖춘 거대한 식민 기업이었다. 이와 같은 독과점을 배격하고 기업들이 서로 공정하게 경쟁하는 '자유 시장'을 스미스는 제시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좌파적 성향의 학자들에게 '보이지 않는 손'은 국가와 거대 기업의 결탁을 억제하기 위함이다. 그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원동력은 다름아닌 스미스의 <도덕 감정론>이다. <도덕감정론>은 스미스가 <국부론>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했던 책이다. 국부론이 인간의 이기심을 다루었다면 이 저서는 공감(sympathy)이라는 도덕의 원천을 강조한다. 또 인간의 마음속엔 타인의 눈으로 자신을 공정히 바라보는 '공명정대한 구경꾼' (the real and impartial spectator)이 있다고 생각했다. 즉, 스미스는 '도덕 감정'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이 견제와 균형을 통해 자유 시장경제를 발전시킨다고 봤다. 결론적으로 스미스는 '인간의 도덕적 범위 내의 자유로운 시장경제 체제'를 꿈꾸었다. 이를 위해 적절한 시장 규제와 윤리는 필수적 요소로 여겼다. 기술의 발전은 일상 생활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산업혁명에서 증기기관 같은 발명품이, 현대사회에서는 인터넷과 인공지능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애덤 스미스가 태어난 지 300년이 지난 지금 인류는 새로운 변곡점에 서있다. 소위 생성형 인공지능(AI) 등 기술의 발전은 세상을 바꾸고 있다. 기술은 이제 소통방식에서부터 업무 방식, 전쟁을 치르는 방식, 국제정치까지 인간의 모든 삶을 바꾸고 있다. AI와 인간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AI가 인간을 대신해 복잡한 결정을 내리고 있다. AI와 인간의 공존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표까지 제기되고 있다. 특히 AI가 노동시장에서 광범위하게 인력을 대체하게 되면 실업 등 사회적 문제까지 심각해질 수 있다. AI라는 새로운 ‘인공의 손(artificial hand)’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지난 6월 글래스고 대학에서 열린 애덤 스미스 탄생 300주년 기념행사에서 나온 기타 고피나스 국제통화기금(IMF) 수석부총재의 연설은 AI 대전환기 우리가 나아갈 길을 잘 진단하고 있다. 고피나스 부총재는 AI가 애덤 스미스 시대의 산업혁명만큼 파괴적일 수 있다고 했다. 그리하여 AI의 '혁신에 대한 지원'(support for innovation)과 '규제 감독'(regulatory oversight)에 대한 균형을 조심스럽게 맞출 필요가 있다고 했다. AI는 인간이 입력한 기존 데이터에 의존하므로 해당 데이터에 내재된 편견까지 복제할 수 있다. 특히 의료나 주요 인프라 등의 분야에서 인간이 AI에 통제권을 넘겨주면 그 위험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심각해진다. 고나파스 부총재는 AI라는 새로운 게임에선 새로운 규칙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애덤 스미스의 관점에서 AI의 의미를 진정으로 고려하려면 그의 첫 번째 저서 <도덕감정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미스가 지금 우리 곁에 있다면 AI 혁명이 가져올 지각변동을 놀라운 눈으로 바라볼 것이다. 아마도 그는 AI의 심장에 인간처럼 '공명정대한 구경꾼' (the real and impartial spectator)과 같은 칩이 필요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 2023-10-22 13:56:29
- [이수완의 월드비전] 캄보디아 父子세습 .. 아버지는 '버팀목'이자 '넘어야 할 산' 단체 사진 촬영하는 캄보디아 새 정부 내각. (프놈펜 AFP=연합뉴스) 킬링필드 찬란한 세계 문화유산 앙코르와트(Angkor Wat)로 유명한 캄보디아의 근현대사를 펼치면 지극히 고통스럽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1953년 프랑스에서 독립한 캄보디아는 입헌군주제를 실시했다. 실권을 거머쥔 노로돔 시아누크(1922~2012) 국왕은 중립 정책을 내세웠지만 베트남 전쟁(1960~1975)에서 북베트남군이 캄보디아 동부 지역을 군사물자 보급 루트로 이용하는 것을 허용한다. 그는 1970년 미국이 지원한 쿠데타로 인해 축출되어 망명자 신세로 전락했다. 미국은 캄보디아에 친미 정권을 세우고 베트남 공산주의자 소탕을 명분으로 수년간 캄보디아 북부 지역을 맹폭했다. 이로 인해 죄 없는 캄보디아 양민 수십만 명이 희생된다. 소위 1차 '킬링필드'다.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캄보디아 대부분 지역은 급진적 좌익 무장세력에 의해 공포와 죽움의 땅으로 변했다. '공산 유토피아 건설'을 꿈꾸던 폴 포트(Pol Pot)의 크메르 루주(Khmer Rouge)에 의해 저질러진 전대미문의 대량 학살로 전체 인구 중 25%인 200만명 가까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위 2차 '킬링필드'의 비극은 몇 세대가 지난 오늘날까지도 깊은 상처로 남아 있다. 1993년 선포된 헌법은 입헌군주제 복귀와 자유민주주의 그리고 다당제를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야권에 대한 무자비한 정치 탄압으로 민주주의는 요원하고 국민들은 고질적인 부패와 빈곤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주에는 38년간이나 집권했던 '스트롱맨' 훈 센(70)이 총리직에서 물러나고 자신의 후계자로 키워온 장남 훈 마넷(45)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오랫동안 준비되고 예상된 시나리오의 권력 대물림이지만 앞으로 캄보디아에 어떤 변화가 나타날지 국제사회의 관심도 커지고 있다. 지난 7월 총선에서 훈 센이 이끄는 캄보디아인민당(CPP)은 전체 125개 의석 중 120개를 차지하는 '압승'을 거뒀다. 나머지 5석도 친정부 성향 정당(푼신펙) 몫이었다. 유력 야당인 캄보디아촛불당(CP)은 정당 등록 서류 미비를 이유로 출마 후보를 내지 못했다.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서방은 캄보디아 선거를 '가짜 선거'라고 지적하면서 선거 참관인 파견을 거부했다. 5년 전인 2018년 총선에서 CPP는 125석 전부를 독식했다. 선거를 앞두고 강력한 야당인 캄보디아구국당(CNRP)이 강제 해산되고 야당 주요 인사들은 내란음모죄, 명예훼손 등 죄목으로 묶어 정치 참여를 차단했다. 훈 센의 정치적 라이벌인 삼 랭시 전 구국당 총재는 해외 망명 중이다. 또 다른 야권의 거물 껨 소카는 가택연금 중이다. 훈 센은 광범위한 반대파 숙청과 함께 장남 훈 마넷의 권력 승계를 위한 지도자 수업과 정비 작업을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 캄보디아 총리는 국왕이 의회 제1당의 추천을 받아 지명한다. 지난 22일 캄보디아 의회는 미국과 영국에서 서구식 교육을 받은 훈 마넷을 새 총리로 선출했다. 의원 125명 가운데 123명이 투표에 참여했고 전원 찬성표를 던졌다. 취임 연설에서 훈 마넷은 “오늘은 캄보디아 왕국에 매우 중요하고 기념비적인 날”이라고 자축했다. 또 캄보디아를 "평화적이고 안정적으로 이끌고 모든 분야에서 발전을 유지하고 개혁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훈 마넷의 새 내각엔 훈 센 가족과 측근들이 요직을 차지했다. 막내아들인 훈 마니는 공무부 장관, 조카사위인 넷 사보엔운이 부총리에 기용될 예정이라고 외신들은 전하고 있다. 강대국의 개입과 침략, 쿠데타, 그리고 내전으로 점철된 약소국가 캄보디아의 현대사에서 첫 평화적 정권 교체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권력 대물림을 통한 훈씨 가문의 집권 연장이다. 이리하여 캄보디아는 북한과 시리아에 이어 지구상에서 몇 안 되는 세습 독재 국가로 이름을 올리게 됐다. 훈 센은 총리 재임기간 우리나라를 여러 차례 방문한 친한파로 알려져 있다. 한때 크메르 루주 부대 지휘관으로 복무했던 훈 센은 1977년 폴 포트 세력의 만행에 실망해 부대를 이탈해 베트남으로 탈출해 망명했다. 1979년 1월 베트남이 크메르 루주 정권을 몰아낸 뒤 세운 괴뢰 정부 하에서 훈 센은 승승장구하며 1985년 33세 젊은 나이에 총리에 올랐다. 1993년 유엔(UN) 주도 하에 치른 총선 이후 제2총리로 왕당파와 권력을 분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4년 후인 1997년 7월 쿠데타를 통해 연립정부 파트너를 축출하고 유일 총리가 되어 1인 체제를 구축했다. 그때 나이가 45세였다. 또 다음 해인 1998년에는 크메르 루주 잔당 지도자들과 협상을 통해 캄보디아에서 30년 동안 이어진 내전을 종식시켰다. 1997년 그는 친북 성향인 시아누크 국왕 등 왕당파 세력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김영삼 정권 당시 우리나라와 22년 만에 재수교를 맺었다.(한국과 캄보디아는 1970년 수교했으나 크메르 루주가 정권을 잡은 1975년 양국 외교 관계가 중단됐다.) 1997년 재수교 이후 힌국과 캄보디아는 여러 차례 정상외교를 포함해 교류와 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훈 센은 크메르 루주 정권에 의해 참혹하게 파괴된 캄보디아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국민을 통제하는 구실로 정적을 끊임없이 제거하는 독재자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분석도 있다. 그는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이 2012년 사망한 후 그 아들 노로돔 시하모니를 꼭두각시 국왕으로 내세우고 실권을 장악했다. 현재 캄보디아에는 정권 교체를 노릴 야당과 시민운동 그리고 독립적 언론은 권력의 무자비한 탄압에 사실상 절멸 상태다. 반면에 30여 년간 이어진 경제 발전과 정치적 안정은 오랫동안 캄보디아 역사에서 경험하지 못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캄보디아 경제는 최대 무역 파트너인 중국의 지원과 투자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영토 분쟁으로 중국과 껄끄러운 관계인 베트남이나 필리핀과 달리 훈 센은 미국과 유럽을 적절히 견제하면서 의도적으로 중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견지했다. 그는 공개적으로 중국을 "가장 신뢰할 만한 친구"로 칭하고 있어 동남아 지역에서 과거의 잃어버린 영향력을 되찾으려는 미국과 유럽 국가들에 중국의 벽은 너무 높아 보인다. 서방 언론은 중국이 최근 비밀리에 캄보디아에 해군기지를 완공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캄보디아는 해당 기지에 대해 중국 관련성을 부인하고 있다. 상왕 정치 훈 센이 총리직을 떠났지만 캄보디아 국내 정치와 친중국 외교 스탠스는 근본적인 변화를 기대하긴 힘들 것으로 보인다. 그가 집권당 대표직을 그대로 유지하는 등 정치 무대를 떠나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년 2월부터 상원의장 자리를 2033년까지 맡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기정사실처럼 흘러나오고 있다. 즉, 자신의 나이 80까지는 국정 운영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소위 '상왕정치'를 펼칠 것으로 보인다. 캄보디아 정치사에서 산전수전 다 겪고 최고 권력에 오른 아버지와 달리 훈 마넷은 차분하게 다듬어진 일정에 따라 총리에 올랐다. 그는 비교적 온화한 성품과 개방적이며 서구적 매너로 캄보디아 젊은이들에게도 인기가 높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훈 센이 1977년 크메르 루주 부대를 이탈해 베트남으로 망명한 뒤 약 4개월 만에 태어났다. 18살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캄보디아인 최초로 웨스트포인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이후 뉴욕대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다음에는 영국으로 건너가 2008년 브리스톨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귀국 후 군 요직을 두루 걸친 뒤 올해 초 육군대장으로 진급했다. 새 내각은 아들을 따르는 젊은 측근 인사들 위주로 구성됐다. 훈 센은 자신과 생사고락을 함께한 고위층 권력층 자제들에게도 장관 자리 등 고위직을 약속했다. 향후 권력 승계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구세대 정치인들의 권력다툼을 방지하고 아들을 중심으로 대를 이은 충성을 유도하기 위한 숨은 전략이다. 권력의 대물림과 민주주의 퇴행에 대한 서방국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캄보디아의 대체적인 분위기는 새 총리 훈 마넷으로 권력을 이양하는 데 대해 조직적으로 저항하는 움직임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평온하다. 또 아버지가 남긴 유산인 뿌리 깊은 정경유착, 정실인사와 족벌정치 등을 아들이 청산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도 극소수다. 또 빈부격차 해소나 부패 척결을 위해 새 정부가 적극 나설 것이라는 공약도 눈에 띄지 않고 있다. 오랜 기간 미국 유학을 했다고 해서 새 총리가 친미 성향을 보인다거나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서방세계의 요구를 수용할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서구로 유학을 다녀온 후 권력을 물려받은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나 바사르 알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의 잔혹한 독재 정치를 보면 훈 마넷도 그들과 크게 다를 것이라고 기대하긴 힘들다. 특히 '상왕'인 훈 센은 만약 아들이 자신의 기대에 못 미치면 언제든지 자신이 돌아올 수도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아버지와 다른 목소리를 내야 국제 무대에서 실세 총리로 인정받겠지만 아버지와 다른 길을 가는 것은 그에게 너무나 큰 모험이다. 현재 그에게 아버지는 든든한 버팀목이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극복해야 할 존재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 2023-08-29 11:29:46
- [이수완의 월드비전] 나토회의 승리 거둔 바이든…푸틴.시진핑의 다음 카드는? 나토 정상회의 참석하는 바이든 (빌뉴스 로이터=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11일(현지시간) 리투아니아 빌뉴스에서 열리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아프칸 굴욕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과 현지인을 완전히 철수시키면서 미 역사상 가장 긴 전쟁인 아프간 20년 전쟁에 종지부를 찍은 지 거의 2년이 됐다. 철군 직전 미군은 장갑차와 공격형 헬기 등 100억 달러 규모의 무기를 아프간 정부군에 넘겨주었지만 탈레반 세력이 파죽지세로 수도 카불을 포위했다. 당시 아수라프 가니 대통령은 곧바로 해외로 도주했다. 이후 1975년 미군의 사이공 탈출을 연상시키는 극도의 혼란 상황이 전개되면서 아프간 전쟁이 초강대국 미국에게 굴욕을 남긴 또 하나의 '실패한 전쟁'이라는 딱지가 붙어있다. 아프간 전쟁은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헌장 제5조에 명시된 동맹국들의 집단자위권이 최초로 발동되었던 국제적 분쟁이기도 하다. 2001년 알카에다의 9·11 공격 이후 오사마 빈 라덴을 지원하는 탈레반 정권의 축출을 위해 시작된 이 전쟁에 미국뿐 아니라 다수의 나토 우방국이 참전했다. 나토 헌장 제5조는 회원국 가운데 한 나라가 공격을 받을 경우 회원국 전체에 대한 침공으로 간주한다. 그리하여 개별 회원국들이 집단, 혹은 개별적으로 군사대응을 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연합군 형태로 많은 병력을 파병하거나 미국과 협력해 아프간 정부를 지원했던 동맹국들은 전쟁이 이런 식으로 허겁지겁 막을 내리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미국은 철군 일정과 방법을 두고 영국 독일 등과 긴밀한 협의나 조율을 하지 않아 불만을 샀다. 그렇지 않아도 트럼프 대통령 시절 터무니없는 방위비 증액 요구에 시달렸던 서유럽 주요 동맹국들 사이에서 아프간 철군 이후 미국에 대한 회의론이 확산되자 중국 견제와 동맹의 복원을 강조했던 바이든 행정부는 심각한 외교적 딜레마에 빠졌다. 특히, 당시 중국 경제는 코로나19 팬데믹에도 불구하고 성장을 지속하며 G7국가들과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기술과 경제력에서 중국이 미국을 추월하는 것은 오직 시간의 문제처럼 여겨졌다. 중국은 새로운 국제질서 구축의 주도자로 기세등등했다. 2년 전과 비교해 지금 미국과 중국의 패권 다툼을 바라보는 국제사회의 시선과 분위기가 크게 변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전 시진핑 국가주석은 러시아 푸틴 대통령을 만나 양국간 '무한대의 파트너십'을 약속했다. 만약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쉽게 승리했다면 중국이 러시아에게 한 이 약속은 신의 한 수로 평가 받을 수도 있었을 법하다. 실패로 끝났지만 용병회사 바그너 그룹의 수장 예프게니 프리고진의 무장반란 시도로 '스트롱맨' 푸틴 대통령의 리더십도 큰 상처를 받았다. 이를 틈타 미국 주도의 서구 진영은 힘을 결집해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고 러시아와 중국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 통제력아 크게 약화된 푸틴 못지않게 푸틴을 지지했던 시 주석도 궁지에 몰려있다. 중국 경제가 리오프닝 이후에도 좀처럼 살아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중국 빅테크 기업에 대한 지나친 규제와 '제로 코로나' 봉쇄 정책이 너무 오래 지속된 것이 가장 큰 실수로 지적된다. 또 하나 골칫거리는 부채이다. 2008년 이후 민간과 공공분야 부채가 매년 평균 10%포인트 상승했다. 부채가 지금은 GDP의 3배에 이르고 있지만 경기위축을 우려해 제대로 손을 못 대고 있는 실정이다. 저출산으로 노동인력도 급감하고 있다. 지난 2년간 위안화 가치도 달러화 대비 12% 하락했다. 자연스럽게 중국이 조만간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 경제국으로 등극할 것이라는 전망도 수그러들고 있다. 우리는 함께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서방국가들은 미국을 중심으로 결집하기 시작했다. 만약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쉽게 승리를 했더라면 미국과 서방세계는 기세가 더해진 중국과 러시아의 합동 공세에 국제질서의 주도권 싸움에서 수세에 몰리거나 패배할 위험에 빠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 전개는 분명 서방진영의 이러한 우려를 서서히 잠재우고 있다. 주권국가인 우크라이나를 침략해 속국으로 만들려한 푸틴에 대한 지지는 국제사회에서 중국에 대한 이미지에 먹칠을 했다. G7 국가들은 중국과의 '디리스킹'에 나서며 반도체 등 첨단산업 분야에서 대중국 수출통제에 들어갔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서방의 군사적 지원이 강화되는 가운데 아태지역과 대서양 지역에서 미국의 동맹들은 군사협력을 강화시키고 있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군이 처한 어려운 상황을 모니터 하고 있는 중국은 군사적 모험에 신중을 기울일 것으로 보인다. 대만 해협 주변에서 중국의 위협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국내 경제의 급한 불 끄기에 바쁜 중국은 군사비 지출을 급격히 늘리는 것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저개발국가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높이기 위한 각종 사업들도 축소될 가능성이 있다. 역설적이지만 이러한 여러가지 복잡한 상황들은 미국과 서방진영이 중국에 대한 지나친 경계를 풀면서 교류와 협력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지난주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의는 2년 전 아프간 전쟁 철수과정에서 굴욕을 맛보았던 바이든 미국 대통령에게 큰 외교적 승리를 안겨주었다. 31개 나토 동맹국은 우크라이나 나토 가입에 대한 구체적인 일정을 제시하지 못했으나 사실상의 '조건부 신속 가입'을 약속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지원에 주요 7개국(G7)을 합류시키고, 종전 뒤에도 우크라이나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장기적인 군사 및 경제지원을 약속했다. 또 회의 개최 직전까지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의 반대로 불투명 했던 스웨덴의 나토 가입을 이끌어내면서 미국 언론들로부터 역시 그는 외교 전문가라는 찬사를 받았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는 지난 4월 핀란드에 이어 스웨덴까지 나토에 가입하게 되면서 유럽 안보에서 전략적인 큰 패배를 안게 되었다. 반면, 외교의 백전노장 바이든 대통령에겐 본인이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룬 정상회의로 평가되고 있다. 이번 나토 정상회담은 유럽이 다시 미국을 중심으로 안보를 강화시키는 전략으로 러시아 위협에 대처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동안 푸틴 대통령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에르도안 대통령이 스웨덴의 나토 가입 반대를 전격 철회한 것은 튀르키예를 이용해 나토의 분열과 동맹 약화를 노렸던 푸틴에게 또 하나의 큰 타격이다. 바이든과 오랫동안 친분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은 CNN에 에르도안 대통령이 마음을 바꾼 것은 수개월 동안 진행된 외교의 산물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번 회의에서 나토 가입에 대한 구체적 일정과 함께 확답을 달라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우크라이나가 미래에 나토의 일원이 될 것이라는 점은 더욱 분명해졌다. 바이든 대통령은 전시 중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은 미국을 직접 전쟁으로 끌어들여 핵무기를 가진 러시아를 불필요하게 자극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반대한 것으로 전해졌다. 고령(80세)의 나이에 내년 대선에 다시 출마하는 바이든 대통령은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왜 우크라이나에 미국인들의 엄청난 혈세가 계속 투입되어야 하는지를 상기시켰다. CNN 등 미 주요 언론은 바이든 대통령은 자신이 바라던 거의 모든 것을 이룬 것으로 평가했다. 그는 12일(현지시간) 리투아니아를 떠나면서 이번 정상회의에서 푸틴 대통령을 향한 메시지가 무엇이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우리는 함께다"라고 강조했다. 나토는 이번 회의에 AP4(한국.일본.호주.뉴질랜드) 정상들을 2년 연속 초청하여 인도·태평양 국가들과의 협력 강화를 모색했다. 이는 나토의 집단방위 개념을 유럽은 물론 아태지역으로 확대해 중국이나 북한의 위험까지 관리하려는 바이든의 구상과도 일맥상통한다. 나토가 중국의 군사적 위협과 러시아와의 연대에 대한 견제 의사를 분명히 한 가운데 중.러 양국은 자카르타에서 열린 아세안지역포럼(ARF) 외교장관 회동에서 나토의 확장 의도에 맞서기로 뜻을 모았다. 중국의 외교 부문 1인자 왕이 공산당 중앙 정치국 위원(당 중앙 외사판공실 주임)은 "소위 '아시아태평양판 나토' 도모에 반대해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중국 외교부는 밝혔다. 이런 가운데 러시아 크렘린궁은 푸틴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조율 중이라고 밝혔다. 수세에 몰린 푸틴과 시 주석이 향후 어떤 반격의 카드를 내놓을지 궁금하다. 하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최근 미·중 양국이 정찰풍선 사건으로 빚어진 날카로운 대립구도에서 벗어나 상호 협력과 대화의 길을 적극 모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내년 대선을 앞두고 중국과 고위급 대화를 통해 소통을 지속적으로 확대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도 부진한 경제를 살리려면 미국의 협력이 절대적이다. 지난달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에 이어 지난주에는 재닛 앨런 재무장관이, 또 이번 주에는 존 케리 백악관 기후변화 특사가 중국을 방문한다. 양국이 이렇게 다방면에서 소통을 이어가다 보면 대만 해협과 한반도를 둘러싼 군사적 긴장의 완화는 물론 세계 모든 국가들의 공통된 관심사인 기후변화와 관련된 공조 방안도 기대해 볼 만하다. 미·중간의 대화기류 속에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급속히 냉각된 한·중관계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지 주목된다. 또 개전 500일을 넘긴 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식을 위해 시 주석이 적극적인 중재에 나서 푸틴의 마음까지 돌리게 할 수 있다면 아마도 전 세계는 환호할 것이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 2023-07-16 13:13:12
- [이수완의 월드비전] 中 따돌리며 공급망 새판짜는 美.. '셈범' 복잡해진 글로벌 반도체 업계 21세기는 반도체의 시대다. 자동차에서부터 인공지능, 최첨단 전투기에 이르기까지 미래 산업과 안보에 필수인 반도체는 제조 과정이 유난히 복잡하고 제품도 다양하다. 그리하여 설계, 공정, 양산, 패키징 등 모든 분야에서 기업 간 끊임없는 협업은 필수다. 반도체 산업의 효율적인 국제 분업과 협업의 생태계는 세계화의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꼽히기도 한다. 미국과 중국의 기술 패권 경쟁이 시작되고 코로나 팬데믹으로 세계 경제가 공급망 대란을 겪은 이후 국제질서는 '세계화의 쇠퇴'로 요약되는 대변환기에 접어들고 있다. 특히 반도체는 이제 개별 기업의 차원을 넘어 '경제 안보'와 국가전략기술의 중심에 놓여 있다. 미국은 중국의 독자적인 첨단 반도체 생산을 막기 위해 동맹국들을 압박하며 글로벌 공급망 새판 짜기를 주도하고 있다. 지난해 통과된 520억 달러(약 68조5000억원) 규모의 반도체지원법은 세계 반도체 산업의 판도를 동북아에서 자국으로 중심축을 이동시키겠다는 의도다. 미국에 반도체 시설을 지으면 업체당 최대 30억 달러의 보조금 신청이 가능한데 보조금을 받는 기업들은 중국에 대한 반도체 시설 투자에 제한을 받을 뿐 아니라 초과 이익을 미국과 공유해야 한다. 특히 반도체 수율, 판매 가격, R&D 계획 등 핵심 기밀의 회계자료까지 요구해 기업 경영의 자율성을 해치고 자칫 핵심 기술의 유출까지 우려되고 있다. 자유시장 개념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여러 가지 독소 조항은 보조금 신청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미국은 지난해부터 인공지능과 슈퍼컴퓨터 등으로 이어지는 첨단 반도체 기술과 장비의 중국 반입을 사실상 금지하고 핵심 장비의 제조업체가 있는 일본과 네덜란드에 동참을 요구하고 있다. EU와 일본도 반도체 패권 경쟁에 가세하고 있다. 지난 4월 430억 유로(약 62조원)를 투입하는 '유럽반도체법(ECA)'을 승인한 EU는 첨단 반도체 점유율을 2030년까지 현재의 두 배 수준인 20%로 끌어올린다는 목표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위탁생산) 업체인 대만의 TSMC는 일본 정부의 막대한 지원금을 받으며 내년 말 가동을 목표로 구마모토현에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주요 선진국들은 반도체 산업을 더 이상 자유시장의 경쟁에 맡기지 않고 있다. 미국과 동맹국들이 군사적 안보동맹처럼 칩 동맹을 결성하고 중국을 고립시키는 전략에 나서면서 세계 반도체 지형이 격변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 정부는 2015년 반도체 산업을 10대 전략 산업의 1순위로 선택한 이후 자국의 반도체 자급률을 당시 10% 수준에서 2025년까지 70%로 끌어올리려고 전폭적인 지원에 나서고 있다. 일부 반도체 전문가들은 중국이 3~5년 내에 설계와 조립, 테스팅과 패키징 분야까지 필요한 기술을 모두 확보해 고난도 첨단 칩을 자체 생산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최근 반도체 대중 수출 부진이 한국의 대중 무역적자의 근본 원인으로까지 분석되고 있는 것은 그동안 4차 산업혁명 시대 아킬레스건으로 평가되던 중국의 반도체 기술이 한국을 크게 위협하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최대 우방국인 미국 내 투자 확대를 지속하는 한편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놓치면 안 되기 때문에 고민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장기적으로 미국과 중국의 두 축을 중심으로 첨단 기술산업이 이원화되어 서로 잘 호환하기 힘든 생태계가 공존할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 반도체도 예외일 수 없다. 문제는 재편 과정에서 미·중 간 초강경 대치로 인해 세계 경제가 극심한 혼란에 빠질 우려가 있다. 예를 들면 미국이 초강력 수출 통제나 무역 제재로 중국의 숨통을 죄면 중국은 희토류 수출 금지나 미국 국채 매입 중단과 같은 그동안 아껴둔 치명적인 보복 카드로 대응할 가능성이 있다. 또 반도체 파워인 대만에 대한 중국의 군사적 위협도 큰 변수다. '실리콘 실드(silicon shield)' 미국이 중국과의 반도체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현재로선 제조공정 기술과 시설에서 최고 수준인 한국 및 대만과의 협력이 필수다. 특히 전 세계 반도체 칩의 60%를 위탁생산하고 있는 대만의 TSMC는 미국의 주요 기업들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중국과 대만의 양안 관계 긴장이 고조되면서 미국으로 볼 때 대만 반도체에 대한 지나친 의존도는 미국의 국가 안보와 산업 안보를 위협하는 요소다. 실질적으로 2021년 발생한 차량용 반도체 공급 부족 사태로 세계 자동차 생산설비가 멈추고 시장이 일대 혼란에 빠지자 미국 정부와 기업들 사이에 탈아시아 공급망 재편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대만 반도체 산업은 '실리콘 실드(silicon shield)'로 불린다. 중국이 대만에 군사작전을 감행하면 대만에서 조달하는 반도체와 전자부픔의 공급이 중단되어 중국 내 공장이 멈추기 때문에 대만의 반도체 산업이 일종의 방패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대만의 반도체 공장과 기술이 중국으로 넘어가는 것은 미국에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지난해 12월 TSMC는 총 400억 달러(약 52조원)를 투자해 2026년까지 애리조나에 두 개의 첨단 3나노미터 파운드리 공장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만에 하나 대만이 중국의 공격을 받아 TSMC 공장이 돌아가지 못하더라도 최첨단 칩의 공급에 큰 문제가 없도록 하겠다는 의도다. 미국과 중국이 대만 문제로 서로 비난의 수위를 높이는 가운데 지난달 초 세스 몰턴 미국 하원의원(민주당·매사추세츠)은 '2023 밀컨 콘퍼런스'에서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면 TSMC를 폭파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언급은 복잡한 반도체 공급망에 대한 미국 정치인들의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말할 수 있다. 40여 년 전 반도체 생산을 아웃소싱한 미국은 대만과 제조 기술력에서 비교가 안 된다. 대만의 파운드리 공장은 세계 최첨단 칩의 90%를 생산하고 있다. 현재 미국 인텔의 선단 공정은 7나노 정도로 알려져 있는데 TSMC는 5나노 미만의 최첨단 칩을 양산하고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애플 등 미국의 내로라하는 기업들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만큼 중국과 대만의 공급망에 뿌리를 깊숙이 내리고 있다는 게 현실이다. 미·중·대만 트라이앵글 체인 현재 미국 기업들의 반도체 설계 역량은 으뜸이지만 반도체의 최종 조립생산은 아시아, 특히 중국과 대만 기업들에 집중되어 있다. 애플이 지난 15년간 이룩한 아이폰 신화도 아시아의 안정된 공급망에 기반한 것이었다. 최근 파이내셜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아이폰에 들어가는 부품 1500여 개 중 절반가량이 중국(26%)과 대만(23%)에 소재한 회사들에 의해 공급된다. 특히 5G 모뎀과 와이파이(Wi-Fi) 칩, 인쇄회로기판(printed circuit board), 카메라 렌즈 등 가장 핵심적인 부품은 거의 대만에 의존하고 있다. 아이폰 한 대에서 차지하는 자재비 중 36%가량이 대만 기업들로 흘러간다. 중국은 자국 내에서 아이폰 95%를 조립생산하고 있다. 아이폰 제품 하나만 살펴보아도 현재 미국과 중국 그리고 대만의 트라이앵글 체인이 얼마나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애플의 하청업체로 일하는 대만과 미국 기업들이 중국 본토에 수백 개의 생산시설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만의 폭스콘은 중국 정저우 공장에서 전 세계 아이폰의 80%를 생산하고 있다. 애플은 또 총매출 중 20%가량을 중국 시장에서 창출한다. 미·중·대만의 공급망 트라이 앵글이 미.중 간 갈등이 고조되어도 공고한 이유다. 미국은 정부가 민간기업들을 통제하기 힘들다. 중국은 이점을 이용해 미국 선거에서 주요 돈줄인 미국 대기업들에는 우호적인 제스처를 보내며 그들이 앞장서 대중국 규제 해제를 위한 로비스트 역할을 하도록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TSMC의 애리조나 반도체 공장 착공식에서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미국에 제조(manufacturing)가 돌아왔다"고 환호했다. 중국 본토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민가 30년 가까운 미국 반도체 엔지니어 생활을 접고 1987년 대만 수도 타이베이 외곽에 TSMC를 설립해 파운드리 시장의 신화를 창조했던 모리스 창(92)도 이날 착공식에 참석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반도체 산업이 "세계의 큰 지정학적 상황 변화를 목격했다"며 "세계화(globalization)와 자유무역이 이젠 '거의 죽었고(almost dead)' 다시 돌아올 가능성이 없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꺼냈다. TSMC의 최대 고객인 애플의 팀 쿡 CEO도 자신들이 디자인한 핵심 칩에 'Made in America' 스탬프가 붙게 되어 미국 제조업 역사에서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중요한 순간"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불과 몇 개월 뒤인 올해 3월 팀 쿡 회장은 중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애플과 중국은 같이 성장한 '공생(symbiotic) 관계'라고 했다. 그가 애플스토어에 나타나자 고객들은 그를 박수로 환영했다. 애플은 최근 인도에 엔지니어와 디자이너를 파견하고 투자를 늘리는 등 시장 다변화를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인도가 중국 시장의 대안이 될지는 미지수다. 최근 월스트리트저널은 폭스콘 관계자 말을 인용해 인도에서 조립되는 아이폰을 중국보다 싼 비용으로 만들기 힘들다고 보도했다. 신규 공장을 지어야 하고, 수많은 부품을 해외에서 가져와야 하고 또 추가적으로 들어갈 물류비용까지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팀 쿡뿐 아니라 중국이 올봄 코로나 봉쇄 조치를 풀고 리오프닝(경제활동 재개)에 나선 이후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등 미국 기업 CEO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머스크 CEO는 방중 기간에 “미국과 중국의 이익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샴 쌍둥이처럼 얽혀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미·중 갈등 구도 속에서도 미국 기업들은 14억 인구의 중국 시장과 최대 생산기지를 포기할 수 없다. 지난해 역대 최대치를 기록한 미국과 중국의 무역 규모를 보면 중국을 배제하고 대중 의존도를 줄이며 글로벌 공급망을 재편하겠다는 바이든 행정부의 전략은 현실성이 부족함을 입증해주고 있다. 특히 자국의 실리만을 우선시하고 동맹국들에는 고압적인 자세의 새판 짜기는 많은 문제점을 노출할 것으로 보인다. 미·중 수위 조절 지난달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에 이어 재닛 옐런 재무부 장관도 중국을 곧 방문한다. 그동안 강경 일변도 정책을 펼치던 미국이 최근 중국과 오랜만에 고위급 간 소통을 통해 상호 갈등이 충돌로 비화하는 것을 막자고 의견을 모으면서 양국 간 화해 무드가 싹트는 모습은 세계 경제에 그나마 긍정적인 요소다. 이러한 기류 변화는 무엇보다도 미국이 대선 국면에 들어서고 있고 중국이 리오프닝 이후에도 경제 회복이 늦어지면서 양국이 수위를 조절하는 것이 서로의 이해 관계와 부합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중국 경제가 침체에 빠지면 비교적 양호한 흐름을 보이는 미국 경제도 대선을 앞두고 어려운 상황으로 빠져들 수 있다. 중국의 입장에서도 경기 둔화를 극복하려면 미국과의 관계 개선은 필수다. 미국과 중국이 국내 사정을 이유로 서로 충돌을 피하며 한 발씩 물러서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첨단 반도체 분야에서 양국 간 첨예한 전략적 경쟁은 더욱 뜨거워질 전망이다. 현재 반도체 패권 경쟁에 나선 국가들은 GVC(글로벌 가치사슬)를 통한 생산 효율성 제고보다는 자국 생산 위주의 경제 안보에 역점을 두고 있다. 반도체 산업이 지닌 고유의 특성인 협엽과 분업 체제가 자국 이기주의에 의해 무너질 중대 기로에 처해 있다. 또 자본주의의 엔진인 시장 메커니즘의 쇠퇴는 자칫 미래 세계 경제에 치명적 부메랑이 될 위험이 크다. 특히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반도체 강국으로 도약한 우리나라는 미·중 간 고래싸움의 유탄을 슬기롭게 피하면서 다른 나라가 따라올 수 없는 기술 격차를 지켜내는 것만이 살 길이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 2023-07-02 14:54:08